"이불·서도호(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한국 작가들) 보유한 한국은 탐나는 美術시장"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3.10.20 23:32

[작품 19점 들고 KIAF 참석한 홍콩 미술계의 이단아 펄 램]

홍콩 재벌 라이선그룹 회장 외동딸… 경영 배우러 간 영국서 그림에 반해 미술 작품 사모으고 갤러리 열어
서양선 中 사회주의 미술 인기지만 전통과 현대문화 다 담겨야만 진짜

"사람들은 쉽게 말해요. 재벌가의 딸이니까 값비싼 미술 작품도 척척 사고, 대도시 한복판에 화려한 갤러리도 열 수 있었겠다고요. 천만에! 내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지만 돈 한 푼 지원해주지 않았어요. 피땀 흘려 첫 전시회를 기획해 열었을 때, 아버지가 내뱉은 첫 마디는 '맙소사! 대체 뭐하는 짓거리람?'이었다니까요."

보라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을 야자수잎처럼 곤두세우고, 다이어트 콜라를 홀짝이던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펄 램(Lam). 홍콩과 상하이의 유명 화랑인 펄 램 갤러리의 대표이자 홍콩의 부동산·금융·호텔·언론 복합재벌인 라이선(麗新)그룹을 이끌었던 고(故) 림포옌(林百欣) 명예회장의 외동딸이다. 지난 3~7일 서울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 참석차 방한한 그녀는 제이슨 마틴, 짐 램비, 마이클 윌킨슨, 주주 순, 수 샤오바이 등 영국 및 중국 작가 7명의 작품 19점과 함께였다.

홍콩에서 태어난 펄 램 대표는 11세 때 자수성가한 부모의 뜻에 따라 영국으로 유학 가 11년간 경제·경영을 공부했다. 부모는 그녀가 다른 재벌가 자녀들처럼 부친의 회사에서 얌전히 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날 때부터 남과 다르게 살기를 갈망했던" 그녀는 1986년 런던의 한 졸업작품전시회에서 무명(無名)의 졸업 예정자가 그린 그림 한 점을 할부로 샀다. 그후 주머니에 돈이 찰 때마다 가진 돈을 털어 미술 작품을 사모았다. 1992년 귀국 후 상하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갤러리를 열자 부친은 "물건을 팔 거면 다이아몬드처럼 돈 되는 보석을 팔아야지, 싸구려 상점 주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노발대발했다.

펄 램. 오른쪽 사진은 펄 램 홍콩 갤러리에서 올해 개인전으로 선보일 미국 작가 제니 홀처의 작품.
펄 램 대표는 자신이 제공하는 사진만 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현대미술 시장은 한국이다. 이우환·이불·서도호 등 좋은 작가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른쪽 사진은 펄 램 홍콩 갤러리에서 올해 개인전으로 선보일 미국 작가 제니 홀처의 작품. /펄 램 갤러리 제공
뚝심만으로 스무 해를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의 목적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서양 작가들과 떠오르는 중국 작가들의 작품을 교차 전시해 아시아와 서양의 교류를 도모'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 특히 서양인은 중국 미술을 잘못 알고 있어요. 우스꽝스럽게 웃는 얼굴, 촌스럽게 칠한 선전문구(프로파간다), 색색깔의 마오쩌둥같이 정치·사회적 배경을 뚜렷이 드러내는 그림만 중국 미술이라 여기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극대화한 미술은 1960~70년대 중국을 달궜던 한때의 현상일 뿐이에요." 그녀는 "진짜 중국 미술에는 수천년간 중국인의 삶과 섞여 흘러온 불교·도교 등 종교와 기후, 생활상이 버무려져 있다"며 "다른 나라의 미술 작품을 구입할 땐 겉의 정치 현상뿐 아니라 속에 담긴 사람들의 가치관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물건'은 가져올 수 있을지 몰라도 '문화'를 가져오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펄 램 갤러리가 홍콩 미술계에서 두드러지는 까닭은 다른 갤러리들이 서양에서 잘 팔리는 중국 전형의 사회주의 작품에 집중할 때, 그녀는 차분한 색조의 중국 추상 작품과 중국 전통 미술에 반전(反轉) 영향을 끼친 영국·프랑스 작품을 고루 조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홍콩 사람이지 중국 사람이 아니에요. 중국 본토 출신인 부모님은 끈질기게 중국 역사와 철학을 내게 가르쳤지만 나는 세계사를 배우는 외국인처럼 중국 문화에 다가갔어요. 처음엔 서양 것에 비해 시시해 보였는데 중국 지식인들의 담백한 예술적 감각에 차츰 놀랐지요. 나중엔 '나는 누구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죠. 그러면서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현대, 대륙을 넘나드는 예술에 관심을 가졌고 한국, 중국, 유럽 모든 곳에서 그 지역만의 전통으로 돌아가 거기서 재창조한 현대미술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2008년 '차이나 아트 파운데이션' 재단을 설립해 동서양 작품 수집 및 작가들 후원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펄 램 대표는 스스로를 "컬렉터(collector)가 아닌 쇼퍼홀릭(shopaholic)"이라 부른다. "미술은 값비싸고 호화로운 상품이기 때문에 '구입한다'고 해야지 '수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쇼핑하듯 미술에 다가가세요. 그러면 즐기는 마음으로 작품 지식을 쌓고 그 문화를 공부할 수 있어요. 제발 진지한 척, 심각한 척하지 말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