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전 보러 갔다가 삶을 보고 왔다

  • 런던=김미리 기자

입력 : 2013.09.05 23:34

런던 대영박물관 '폼페이'展을 가다
벽화·가구·음식·족집게까지 전시… 죽음의 흔적에서 로마인 일상 발견
39만명 관람한 흥행작으로 부상… 유물 전시의 새로운 가능성 보여줘

기원후 79년 8월 어느 날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만 연안의 고대 도시 헤르쿨라네움. 평화로운 이 해안 도시의 한 가정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나무 요람에 누워 쌔근쌔근 자고 있다. 몇 시간 뒤 자신을 덮칠 비극적 운명은 전혀 모른 채. 이날 오후 때때로 연기를 뿜곤 했던 근처 베수비오 화산이 대폭발했다. 사람들은 비명 지를 새도 없이 400도가 넘는 고온에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20m가 넘는 화산재에 뒤덮여 도시 전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람 속 아기의 짧은 생도 그렇게 마감됐다.

'주인'은 죽었지만 요람은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주인 잃은 요람'은 고온으로 인해 순식간에 탄화(炭化)돼 숯으로 변했다. '숯이 된 요람'을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쓰던 가구, 음식, 예술 작품 등 450점의 폼페이·헤르쿨라네움 유적이 처음으로 이탈리아 땅을 벗어나 전시되고 있다. 지난 3월 28일 시작해 이달 29일까지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열리는 특별전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삶과 죽음(Life and Death in Pompeii and Herculaneum)' 전시이다.

39만 관람…블록버스터 전시

전시는 화산 폭발만큼 뜨거운 열기로 시작했다. 사전 예매 5만장이 예약 시작과 함께 동났다. 지난 5년간 대영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이다. 또 석 달 만에 당초 목표 관람객인 25만 명을 돌파, 8월 말 현재 39만 명이 전시장을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4월 초부터 대영박물관 전체 관람객 수는 170만 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5% 늘었다. 대영박물관의 역사를 새로 쓰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된 셈이다.

흥행의 가장 큰 요인은 고대 로마 사람들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 5년 동안 전시를 기획한 수석 큐레이터 폴 로버츠(로마 담당 부서 총책임자)는 "외모에 관심 많고 부를 과시하기 좋아하는 등 로마 시대 사람들의 삶이 현대인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며 "그렇기에 이 전시는 '죽음'으로 시작됐지만 '삶'에 방점이 찍힌 전시"라고 말했다.

2000년 전 폼페이의 일상

폴 로버츠의 말처럼 전시품 하나하나가 2000년 전 고대 로마 시대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아트리움(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오는 안뜰)을 재현한 공간에는 육중한 금고가 떡하니 놓여있다. 당시 노예 신분에서 해방돼 경제 활동에 참여했던 자유민(freedmen)들은 부를 과시하려고 마당에 금고를 뒀단다. 이와 함께 그들이 부를 만끽하기 위해 마당에 진열했던 벽화와 동상, 은그릇 등이 진열됐다. 과시는 외모에 대한 유별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착용했던 액세서리, 심지어 잔털을 뽑기 위해 썼던 족집게도 전시됐다. 나란히 그려진 빵집 부부의 벽화에서는 여권(女權) 신장을 엿볼 수 있다. '집의 심장'으로 여겨졌던 정원의 예술품은 정교함이 대단하다. 벽에는 온갖 새들과 초목이 프레스코화로 담겨있다. 일부 벽화 위에 남은 아이들의 낙서는 2000년 전의 동심(童心)을 보여준다.

고등어를 삭혀 만든 액젓 가룸(garum)을 팔던 가게에 붙였던 모자이크, 숯으로 변한 빵…. 식당에서 발견된 양손에 와인병을 든 해골 모자이크는 각박한 삶에 지친 현대인을 향해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순간을 즐겨라."

이번 전시를 계기로 가디언 등 영국 유력지들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인류의 과거를 간직한 소중한 유적이라는 점을 재인식시켜 더 이상 상업적 관광지로 전락하지 않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는 여론을 확산시켰다. 그 영향일까. 지난달 30일 독일 뮌헨 공대 연구진은 내년 여름부터 이탈리아 정부가 시작하는 '지속 가능한 폼페이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해 훼손되고 있는 이 지역의 유적을 복원하는 데 참여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