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절박하게 선다, 무대라는 그 낭떠러지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08.05 02:01

[성실하게 '大器晩成'한 배우…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의 에녹]

늦은 나이에 뛰어든 뮤지컬, 연줄·요령 없어 오디션도 낙방… 이번役 됐을 땐 다 얻은 것 같아
모든 무대가 내겐 오디션장… 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해요

"당신 이름이? 아, 맞다, 소부랄씨!" 프랑스 혁명대원 일망타진에 나선 그의 이름은 쇼블랑. 그러나 올여름 들어 하루에 한 번씩 '소부랄'로 불린다. 그것도 1000명 넘는 관객이 모인 공연장에서. 정체를 숨기고 비밀결사대를 이끄는 귀족 퍼시가 그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들먹이며 놀릴 때마다 객석에서는 어김없이 폭소가 터진다. 붉으락푸르락 낯빛이 변하는 악당 쇼블랑. 그러나 배우 에녹(33)이 연기하는 악당에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아련한 진심이 묻어난다. 쇼블랑이 사랑하는 여주인공 마그리트에게 "내게 돌아오라"며 애원할 때면 객석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듯 낮은 한숨 소리가 들린다.

"매번 공연마다 낭떠러지에 선 심정으로 나갑니다. 절박하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최고를 보여 드리려고 해요." 지난 2일 공연장인 LG아트센터에서 만난 에녹은 서른 가까운 나이에 데뷔한 '대기만성' 배우의 절실한 각오를 내비쳤다. 그는 2008년 코미디 뮤지컬 '알타 보이즈'로 시작해, '캣츠'에서 바람둥이 고양이 럼텀터거로 섹시한 매력을 발산했고 올해 초 흥행 뮤지컬 '레베카'에서 악역을 맡으며 팬층을 확실하게 다졌다.

인상은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에녹은 카메라 앞에 서자‘악역’의 얼굴로 돌변했다.
인상은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에녹은 카메라 앞에 서자‘악역’의 얼굴로 돌변했다. /이덕훈 기자
에녹의 성장은 실력과 성실함으로 꾸준히 쌓아온 결과라는 점에서 아이돌 위주의 '깜짝 발탁'이 대세가 된 공연계에 던지는 의미가 남다르다. 연극과 뮤지컬 캐스팅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연줄도 작용한다. '아는 배우'가 '믿는 배우'가 되며 캐스팅 확률이 높아진다. 에녹은 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는 공연계에서 끈기있게 자신을 증명하면서 배역을 쟁취했다. '스칼렛 핌퍼넬' 연습 중에는 고참 제작진들도 "저렇게까지 성실하고 진지할 수가 있나"며 수차례 감탄했다는 후문이다.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 바다는 "에녹의 성실한 연기에 저도 저절로 연기에 녹아들게 된다"고 말했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제가 잘난 줄 알았어요. 들어가기 어렵다는 CF 제작사에서도 일해봤고요." 그러나 위암 판정을 받은 부친이 설상가상 빚보증을 잘못 서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외아들인 그에게 생계의 책임이 떨어졌으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일용직 아르바이트뿐이었다. 청과물 시장에서 하루 10시간 수박을 져 나르며 일당 4만원을 받았다. 호프집·당구장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대학교 선배의 소개로 뮤지컬 오디션을 처음 본 게 5년 전이다. "무대에 서는 것만도 행복한데,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한 달 지나니까 돈까지 주더라고요." 그는 "배우가 되어 첫 월급 100만원을 받아든 순간의 기쁨을 지금도 기억한다"고 했다.

에녹이 연기하는 악당 쇼블랑은 악역이되 미워하기 힘든 매력이 넘친다.
에녹이 연기하는 악당 쇼블랑은 악역이되 미워하기 힘든 매력이 넘친다. /이덕훈 기자
뮤지컬이라는 '신세계'에 빠져든 그는 오디션 공고가 나면 무조건 달려갔다. 하지만 보는 족족 떨어졌다. 정보가 없었던 그가 준비한 오디션 곡은 교회에서 배웠던 찬송가. 게다가 언제나 단벌 양복 차림이었다. 신인이라기엔 늙은 데다, 경력도 일천한 그를 써주는 제작사는 없었다. 불합격 통보를 받던 밤마다 이를 갈며 잤다. "('오페라의 유령'의 배우) 브래드 리틀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겟세마네'를 부르는 것을 들었어요.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어요." 레슨비가 없던 그는 연극 '쉬어 매드니스'에서 배우 겸 조연출 겸 음향기사 겸 조명기사로 들어가면서 귀동냥과 눈동냥을 시작했다. 대타로 들어간 '록키호러픽쳐쇼'에 이어, 동성애가 정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자나, 돈트'에 출연한 그를 보고 연출가 유희성씨가 '모차르트!' 무대에 설 기회를 줬다.

지난 5월 '스칼렛 핌퍼넬' 오디션 합격 소식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미친 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모든 무대를 선택받기 위한 오디션이라 생각하고 섭니다. 무대라는 낭떠러지에 설 때마다 박수쳐 주시는 관객 한 분 한 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 9월 8일까지 역삼동 LG아트센터, 1577-3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