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바치리… 26년 前 그 약속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10.01 23:39

최인호 미공연 희곡 '향기로운 잠'
연출가 채윤일, 고인에게 부탁받아 내년 명동예술극장 공연 추진키로

연출가 채윤일(왼쪽)과 故 최인호 작가.
연출가 채윤일(왼쪽)과 故 최인호 작가.
1962년 용산고 문예반에서 '날리던' 고등학생 채윤일은 우연히 서울고 교지에 실린 단편소설을 읽다가 탄성을 질렀다. "야, 너 진짜 죽인다." 채씨를 감탄하게 한 '너'는 서울고 2학년생 최인호였다. 이후 '작가 최인호'와 '연출가 채윤일'로 교류를 계속하던 둘은 1987년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최인호의 희곡 '향기로운 잠'(1976)을 채윤일이 연출해 올리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25일 작가가 별세할 때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채윤일(67) 게릴라극장 예술감독은 1일 "대학 시절 단역배우로도 나섰던 고인(故人)의 무대 사랑을 기리기 위해 26년 전 약속을 이제라도 지키겠다"고 말했다.

고(故) 최인호(1945~2013)가 남긴 미공연 희곡이 무대에 오른다. 채씨는 "고인이 염두에 뒀던 명동예술극장에서 내년 상반기 중 공연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원래 '향기로운 잠'은 1976년 연출가 임영웅씨의 의뢰로 완성됐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20대 여성이 주인공. 뚜렷한 줄거리 없이 시청각을 강조한 이미지극인 데다 "여주인공은 매우 아름답고 이지적이며 개성적이나 매우 센시티브하게 보여야 한다"는 작가의 까다로운 주문 등이 겹쳐 공연되지 못했다. 250매에 달하는 작품은 1977년 '문학사상' 2월호에 발표됐다. '최인호 제2기 문학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중편 '두레박을 올려라'(250매), '개미의 탑'(200매)과 함께 실렸다. 잡지에는 "700매의 신작 3편을 동시에 발표함으로써 최인호의 본격 문학에 대선회(大旋回)가 시작됐다"고 소개됐다. 32세였던 고인은 '작가의 말'에서 "나는 요즈음 철이 든 것 같다"며 "사물은 모두 자기 존재에 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필연성과 만나는 길이 글을 쓰는 작업인 것 같다"고 썼다.

초고(草稿) 완성 당시 임영웅씨의 산울림소극장 연출부에서 일하던 채씨는 희곡의 독특한 표현과 형식에 반했다. 공연될 기미 없이 11년이 지난 1987년, 고인은 "채형, 한번 해봐줘"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예술적인 당부도 잊지 않았다. "미장센은 불란서 영화 같고, 느낌은 독일 표현주의 영화 같았으면 좋겠어."

고인의 별세 소식을 들은 채씨는 부랴부랴 국회도서관으로 달려가 잡지에 실린 희곡을 복사해 다시 읽었다. "지금 읽어도 감각이 놀랍다. 반드시 무대에 올려 하늘에 있는 그에게 선물로 바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