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고 싶어, 하얗게 칠한 얼굴

  • 곽아람 기자

입력 : 2013.09.16 23:44

박유아 개인전 '오르골이 있는 풍경'

노란 저고리에 자주색 치마를 입은 새색시, 그리고 옆에는 푸른색 양복을 차려입은 남편. 붉고 흰 꽃밭을 배경으로 다정하게 앉은 이 부부에겐 그러나 얼굴이 없다. 화가 박유아(52)는 그림을 완성한 후 인물의 얼굴을 흰색 물감으로 덮어버렸다. 작품 제목은 '고씨 부부(Mr. & Mrs. Koh)'. 작가는 "전 남편과의 신혼 때인 1980년대 중반 찍은 사진을 모티프로 작업했다"고 밝혔다.

다음 달 13일까지 서울 소격동 옵시스아트에서 열리는 박유아 개인전 '오르골이 있는 풍경'의 주제는 '결혼'. 작가는 자신이 전 남편과 찍은 사진, 부모와 친구 부부들의 사진을 캔버스에 옮기고 얼굴을 하얗게 칠해 버렸다. 눈·코·입이 사라진 화면 속 인물들은 결혼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배역을 맡은 배우들처럼 보인다. 유명 변호사와 이혼한 작가의 이력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대목이다. 작가는 "결혼 생활이라는 게, 지나고 보니 태엽을 계속 감아줘야 노래를 들려주는 오르골과 같더라. 수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결혼인데 나는 실패했다. 결혼 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힘, 권력 관계 등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의 신혼 때 사진을 캔버스에 옮긴 그림‘고씨 부부’와 함께한 박유아.
자신의 신혼 때 사진을 캔버스에 옮긴 그림‘고씨 부부’와 함께한 박유아. /곽아람 기자
이화여대 동양화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 중인 박유아는 고(故)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의 둘째 딸. 그는 "작품으로써만 평가받고 싶지만 늘 '누구 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익숙한 일이지만 종종 '나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몇 년 사이, 그의 작품에는 아예 가족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퍼포먼스 작품 '효(孝)'에선 부모 형제 초상화를 걸어놓고 생고기와 내장을 던지며 피바다를 만들었다.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탁탁 털어버렸어요. '사람들이 왜 나만을 봐주지 않나'라는 욕망 때문에 제가 불행해지고 있더라고요."

'가족의 무거움'을 껴안은 이번 전시에 매일 남편이 좋아하던 다방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들고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어머니를 그린 그림, '박씨 부부(Mr. & Mrs. Park)'가 나왔다. (02)735-1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