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다. 장한나

입력 : 2013.10.08 17:13

‘첼로 신동’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한나. 갓 서른을 넘긴 그녀가 이제는 첼로가 아닌 지휘봉을 들고 세계무대에 선다. 지휘자 장한나에게 음악은 끝없는 은하계다.

지휘자 장한나


긴장감이 도는 첼로 콩쿠르 경연장.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첼리스트들이 모두 모인 이곳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하게 하는 참가자가 있었으니… 이 행사를 마련한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이 순간을 이렇게 전했다.


“무대를 보고 있었는데, 첼로가 혼자 걸어나오는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첼로에 가려질 만큼 작은 참가자였다. 11세 최연소 참가자인 이 작은 꼬마 첼리스트는 이날 언니, 오빠들을 제치고 10명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대상을 수상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연주를 마친 이 아이를 번쩍 안고는 “아주 잘했다”며 칭찬했다. 신동 첼리스트 장한나의 세계무대 데뷔기다.


한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로 세계무대를 누비던 장한나가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2007년 성남아트센터에서 연합청소년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지 7년 만이다.



지휘자로 데뷔한 지 7년 만에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장이 됐어요.
매우 기쁘고 아주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카타르 왕실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키우기 위해 창단해서인지, 오디션 당시 경쟁률이 대단했더라고요. 세계 10대 도시에서 오디션을 진행해 백6명의 단원을 뽑았거든요. 창단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오케스트라예요. 지난해 6월 객원 지휘를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고, 이후 단원들의 요청과 오케스트라 매니지먼트의 동의를 받아 세 번째 지휘자를 맡게 됐습니다.


각오가 남다를 듯한데요.
일단 제 목표는 음악적인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과 오케스트라의 정체성을 키우는 것, 두 가지예요. 오케스트라가 위대하면서 재미있는 점은 악보 그대로 연주하면서도 그 오케스트라만의 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에요. 베토벤은 베토벤답게, 드뷔시는 드뷔시답게, 그러면서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처럼 오케스트라의 고유 사운드를 가지고 있어야 하죠.


그럼 이제 카타르에 머무는 건가요?
계속 있는 건 아니고, 들락날락하면서 한 시즌당 15주, 총 110일 정도 있을 것 같아요. 상당한 긴 시간 동안 오케스트라와 함께할 것이기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어요.



음악으로 허물지 못하는 장벽은 없다


지휘자 장한나는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만 지휘하는 것은 아니다. 노르웨이 트론드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 지휘자도 맡았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쾰른 서독일 방송교향악단 등의 지휘 일정이 잡혀 있다. 장한나가 직접 오디션을 통해 단원을 뽑는, 성남아트홀 기획공연인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도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았다. ‘마에스트라 장한나’로 불려도 좋을 만한 이력이다.

지휘자 장한나


성남아트홀에서 진행하고 있는 <장한나의 앱솔루트 클래식>의 음악감독을 맡은 지도 벌써 5년이 됐어요.
단원들의 열정과 패기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앱솔루트 클래식 오케스트라는 지금의 음악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매회 새롭게 태어나는 오케스트라가 되었으면 해요. 더욱더 큰 감동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할 거고요. 앱솔루트 클래식을 처음 시작할 때 두 가지 목표가 있었어요. 좋은 오케스트라 음악을 만드는 것과 더 많은 사람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전해주는 것이죠.


지휘자로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노하우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특별한 노하우는 없어요. 다만 2007년 지휘자로 데뷔했을 때나 지금이나 느끼는 것은 ‘진심은 통한다’는 거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짧게 만나더라도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고 헤어지는 건 분명히 ‘음악의 힘’이 있기 때문이에요. 지휘자로서 음악에 대한 사랑과 비전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때 허물지 못하는 장벽은 없는 것 같아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한 음악가의 심정으로 단원들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첼리스트로, 또 지휘자로 매번 무대 위에서 에너지가 넘쳐요. 에너지의 근원은 어디에 있나요?
음악에 대한 순수한 마음,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좋은 연주가 가능한 것 같아요. 연주를 통해 아름다운 열정을 다시 확인하게 되고 동시에 청중도 ‘인생에서 음악이 왜 필요한지’ 깨닫게 되죠. 베토벤은 청각을 잃어버리고 음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작곡을 했어요. 우리(연주자와 청중)는 베토벤 교향곡 한 곡이 연주되는 35~40분 동안 베토벤의 마인드를 경험하게 돼요. 불가능마저도 가능케 만든 힘을 공유하는 거죠. 그 순간을 느끼는 것이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음악이 주는 감동이 자신의 삶에 어떤 역할을 미치는지 많은 사람들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지휘자로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하하하, 워낙 잘 몰라서 그런지 그런 건 못 느꼈네요.


음악감독으로 어떤 일들을 하나요?
오케스트라의 일 년 프로그램을 짜고 솔리스트, 객원 지휘자 등을 선정해요.(물론 지휘도 한다.) 많은 책임감이 따르는 자리예요. 오케스트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비전이 필요한데, 그런 의미에서 음악감독이 생겨난 것 같아요.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첫 무대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9월 21일이에요. 프로그램은 라벨의 ‘라발스’와 베토벤 ‘교향곡 7번’, 중동 작곡가의 협주곡으로 구성했어요. 베토벤 ‘교향곡 7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교향곡이에요. 중동 작곡가의 곡은 매회 들어갈 예정이고요.

지휘자 장한나

연주·지휘? 10년을 생각한다

장한나를 세상에 알렸던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녀에게 세 가지 당부의 말을 전했다. 첫째는 상업화된 음악시장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한 달에 5회 이상 음악회를 하지 마라. 둘째는 훌륭한 지휘자와 연주하며 음악을 배워라. 셋째는 보통 학교에 다니고 또래 친구들과 정상적으로 성장하라. 또한 그녀를 아끼던 지휘자 주세페 시노폴리는 “음악은 중요하지만 음악만 있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녀가 음악가라면 당연한 프로필인 음대 졸업장을 마다하고 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한 건 이들의 조언 덕분이다. 철학은 지휘의 길로 이끈 계기이기도 하다.



지휘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11세 때 콩쿠르에 1등을 하면서 바쁘게 연주자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지휘에 대해 생각이 없었죠. 지휘에 필이 꽂힌 건 어느 날 갑자기였어요. 하버드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였죠. 간단히 말해, 더 넓은 음악의 세계로 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사실 첼로로 연주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얼마나 제한적인가요. 그 당시 저는 그것을 거의 맛본 상태였고, 더 넓은 음악 세계를 꿈꿀 수밖에 없었어요. 그것이 바로 교향악의 세계였죠. 처음에는 독학으로 악보를 공부했어요. 그러다 지휘에 대한 열망이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오늘까지 오게 됐습니다. 지휘를 택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하거나 갈등하지 않았어요.


지휘는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요?
마치 우주로 나아가 날마다 새로운 행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같아요. 교향곡을 비롯해 오페라까지 합치면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하게 많은데, 그 음표를 합친다면 정말 은하계보다 방대할 거예요. 항상 새로운 것이 저를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무척 행복해요.


지난해에는 스승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협연자와 지휘자로 만나기도 했어요.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협연자로도 초청할 예정인가요?
어떻게 알았어요(웃음)? 아직 웹사이트에 시즌 일정이 뜨지 않았는데. 지난해 성남아트홀에서 선생님과 함께 연주했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선생님 소리를 옆에서 듣는 것으로도 연주자로서는 큰 공부가 돼요. 그런 소리를 가까이에서 듣고, 그에 어울리는 소리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함께 연주할 때 미샤 마이스키의 조언이 있었나요?
그냥 많이 좋아하셨어요. 선생님께 이메일로 협연을 제의한 지 10분 만에 “언제 어디서든, 무슨 곡이든 한나 너와 함께라면 좋다”라는 답을 받았죠. 제가 지휘하는 무대에는 처음이었는데, 그냥 정말 좋다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현존하는 첼리스트 중에서 최고예요. 선생님의 연주는 딱 들어도 알 수 있는데, 그건 음악에 민감하다는 거고, 그만큼 강렬히 느끼고 표현한다는 거죠.


지휘자로 롤모델이 있나요?
정말 많아요. 우선 푸르트 뱅글러와 레오나르도 스토코프스키가 있는데 스토코프스키는 마술사 같아요. 또 카라얀, 번스타인, 클라이버 이 세 사람이 없었으면 21세기는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36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귀도 칸텔린의 연주도 놀랍고요. 음악은 나이가 아닌 영혼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햇수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 사람이에요.

장한나는 지난해 앱솔루트 클래식에서 자신의 스승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자와 협연자로 섰다. 그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다.
장한나는 지난해 앱솔루트 클래식에서 자신의 스승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와 지휘자와 협연자로 섰다. 그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다.

첼로는 친구, 지휘는 은하계

장한나는 1982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3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6세에 첼로를 만났다. 음악을 전공한 엄마 덕분이었다. 1993년에는 줄리어드음대 예비반에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첼로는 어떻게 만났나요?
무남독녀로 자랐어요. 엄마는 작곡과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음악 애호가라 “음악을 형제 삼아 살라”는 의미로 제게 피아노를 가르치셨죠. 그런데 피아노는 재미가 없었어요. 너무 커서 페달을 밟을 수도 없었고요. 피아노에 흥미를 갖지 못하자 어머니는 제게 첼로를 사주셨어요. 초등학교 입학 선물이었죠. 첼로는 정말 친구 같았어요. 덩치도 저와 비슷하고, 함께(들고) 다닐 수도 있고. 또 소리를 만든다는 게 실감이 나는 악기였어요.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면 소리가 나지만, 첼로는 누르고 그어야 하거든요. 소리는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구나, 라는 나름의 인식을 하게 됐죠.


첼리스트 장한나를 만나고 싶은 팬들도 많아요. 요즘 지휘가 많던데, 첼로 연주는 안 하나요?
첼로 연주도 물론 할 거예요. 그러나 굉장히 선별적으로 하겠죠. 카타르에서 15주, 노르웨이에서 3주를 보내게 되면 시간이 많지 않아요. 사람들이 ‘장한나가 이제 첼로 안 하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저는 10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첼리스트와 지휘자의 활동 비율을 몇 대 몇 정도로 생각하나요?
지휘의 비중이 훨씬 많을 것 같아요. 지휘는 연주할 수 있는 곡도 훨씬 많고, 역할도 많기 때문이죠. 비율은… 하하하, 그건 잘 모르겠네요.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첼로 협연을 할 법한데요.
카타르에서는 안 할 것 같아요. 중동이 워낙 습하고 더워서 첼로를 가지고 가기 겁이 나거든요. 첼로는 워낙 예민한 악기라, 온도·습도 조절이 힘들어요.


비발디 첼로 협주곡이 마지막 레코딩이었어요. 음반 녹음 계획은 없나요?
첼로 연주는 녹음할 시간이 없어요. 또 ‘(이 곡은 내 연주로) 꼭 남겨야 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거절해요. 레코딩을 할 때 굉장한 책임감을 느끼는데 ‘음반은 내가 죽어도 남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죠. 저만 해도 얼마나 많은, 돌아가신 음악가들의 레코딩을 듣고 있는지…. 그것만 생각해도 조심스러워요.


카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녹음 계획은 있나요?
1년에 20장의 음반을 내자는 음반사도 있었어요. 녹음은 음악감독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오케스트라의 성장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계획해야 해요. 베토벤 교향곡만 해도 얼마나 많은 음반이 있나요? 그런 상황에서 공정한 제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케스트라가 성장한 다음에 하는 게 맞죠.


첼로와 지휘, 두 작업을 비교한다면요?
첼로 연주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작업이라면, 지휘는 망원경으로 탐험하는 작업이에요.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두경아 기자 | 사진 제공 성남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