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워서" "곧 사라질 것 같아" 달동네 가는 화가들

  • 곽아람 기자

입력 : 2013.08.26 23:27

[미술 소재로 주목받는 달동네]

자칫 소재주의에 빠질 우려… 삶의 성찰 담은 공간 해석 필요
컬렉터들은 향수에 젖어 구입 "어릴 적 동네 생각나게 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지붕과 담장, 가파르고 좁은 골목길에 다닥다닥 엉겨붙은 낡은 집들, 혹은 알록달록한 슬레이트 지붕 위에 걸린 푸른 하늘….

'88만원 세대'의 자기 발언인가, 가난에 대한 호기심 어린 '엿보기'인가. 젊은 작가들의 미술축제인 '2013 아시아프(ASYAAF·아시아 대학생 청년작가 미술축제)'를 비롯, 요즘 젊은 작가들 사이에선 '달동네'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따스한 이미지 때문에 인기

가난한 젊은 문인들이 편의점·고시원 등을 소재로 삼는 것은 자기 체험에 대한 고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요즘 미대생에게 '달동네'는 생활의 장소가 아니다. 그들은 왜 달동네에 주목할까.

일단은 따스하고 정겨운 이미지 때문이다. 서울의 달동네 풍경 세 점을 아시아프에 내놓은 문예지(23·성신여대 재학)씨는 "당고개·삼각지 등지에 봉사활동을 자주 다녔는데, 정을 나누며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 따스함을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난해 아시아프에서 관람객 대상 인기투표 1위를 차지한 이보윤(28·경희대 졸업)씨도 부산 달동네 풍경을 주로 그린다. 이씨 역시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에서 느껴지는 정다움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안세권의 2006년작 '월곡동의 사라지는 빛 2', 정직성의 2006년작 '망원동: 연립주택 3'.
하나둘 사라져가는 서울의 오래 된 골목 풍경은 작가들에게 '기억의 저장소'로서의 풍경이다. 왼쪽부터 안세권의 2006년작 '월곡동의 사라지는 빛 2', 정직성의 2006년작 '망원동: 연립주택 3'. /한미사진미술관·정직성 제공
시각적 효과가 크다는 것도 젊은 작가 지망생들이 달동네를 그리는 이유다. 달동네 풍경 속에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를 집어넣어 빈부 격차의 현실을 표현한 김용권(22·백석예술대 졸업)씨는 "자잘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시각적으로 강렬한 효과를 준다는 사실이 달동네를 그린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씨는 인천의 한 달동네와 태국 빈민촌에서 본 풍경을 뒤섞어 가상의 '달동네 풍경'을 만들었다.

물론 빈민가 풍경이 '이국적 풍경'으로 소비되는 것에 대한 경계도 있다. 한 화가는 "이색 취미 대신 삶에 대한 성찰을 담아 어떻게 공간을 해석하느냐 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칫 소재주의로 빠질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라지는 것들의 역사성' 기록

달동네나 오래 된 골목 풍경은 기성 작가들도 즐겨 그리는 소재다. 독립 큐레이터 김지연씨는 "버려지고 소외된 공간을 주목하는 것이 작가들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작가들은 여기에 '사라지는 것의 역사성'을 첨가한다. 서울의 연립주택 풍경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정직성(37)의 관심사는 도시 공간의 질서다. 연립주택에서 자랐고, 지금도 연희동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는 작가는 "도시의 구조 변화를 해석한다는 느낌으로 연립주택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월곡동 뉴타운 재개발 현장, 청계천 복원공사 현장 등을 찍어온 사진가 안세권(45)은 "사라져버릴 '마지막 풍경'을 누군가는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도시의 변화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물음과 닿아 있다"고 말했다. 오래된 아파트를 즐겨 그리는 정재호(42)는 "아무런 역사성이 없는 새 동네에는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 인상파 작가들이 도시의 뒷골목을 그렸을 때부터 화가들은 '낡은 것'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다"고 했다.

컬렉터들은 그런 그림에서 '향수'를 느낀다. 6~7년 전 정직성의 '연립주택'을 처음 구입한 컬렉터는 재미교포. 정직성은 "후암동 일대를 그린 그림이었는데,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를 생각나게 한다'면서 그림값과 맞먹는 운송료를 감당하면서 120호짜리 작품을 사 갔다"고 회상했다. 표미선 한국화랑협회장은 "'달동네 그림'의 인기는 빈티지 열풍과 비슷하다. 현대인들이 애상적이고 심금을 울리는 달동네 풍경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