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스타강사 관두고 대기업 은퇴하고… 연극에 미친 서울대생 무대로 돌아왔다

  • 김신영 기자

입력 : 2013.08.17 03:05 | 수정 : 2013.08.17 20:37

서울대 연극동호회 출신들의 극단 '관악극회' 두번째 공연 앞두고 구슬땀

25년만의 演出, 철학과 54학번 이순재
50년 전 연극판 기웃거릴 때… 아들 찾아서 상경한 아버지
'야, 이거 꼭 해야겠냐' 했는데…
그때 남들처럼 대학원 갔으면… 지금 어디선가 교수하고 있겠죠

국문과 64학번 심양홍
대학시절 공연 취소에 항의… '연극 아니면 죽음을'
자살소동 벌인 적도 있어… "다리는 무대 서는데만 쓸것"

금속공학과 72학번 정창옥
졸업 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절교'했지만
은퇴 1년만에 연극과 재회… "잃어버린 나를 찾은 느낌"

경영학과 86학번 김동범
극단 만들었다 부도난 후… 연극 유학가려 강사 시작
이후 학원사업 손대 성공… "농부역할 위해 다이어트중"

지구시스템학과 99학번 태영
번듯한 미래 기대한 부모님… 뜻 안 어기려 대기업 입사
8개월 만에 사표 내고 나와… "무대에 서면 행복한걸요"

아서 밀러의 ‘시련’을 연습 중인 이순재 씨
"절하지 마! 절하지 마! 서양 사람들 절 안 해. 그냥 나가! 그리고 너는 얘를 팍 밀어, 팍!"

폭염이 질주하던 8월 초 어느 주말 서울 충정로의 한 건물 7층. 에어컨도 나오지 않는 빈 사무실 공간에 배우 이순재(78)가 땀을 흘리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순재의 지도 아래 두꺼운 대본을 들고 가상의 무대를 오고 가며 연기 연습을 하는 이들은 서울대 연극동호회 출신들이 만든 극단 '관악극회' 배우들이다. 9월 초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 올릴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대표작 '시련'(The Crucible) 연습은 매일 오후 2시부터 밤 12시 넘어까지 이어진다. 이순재는 이 연극에서 배우가 아닌, 연출을 맡았다. 1988년 잉그마르 베르히만 원작의 '가을 소나타' 이후, 25년 만의 연출이다. "우리 단원들이 이해력이 아주 빠릅니다. 이해를 잘하는 그 능력을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걸 좀 어려워하죠."

지난해 이순재가 주도해 창단한 '관악극회'의 두 번째 공연작인 '시련'은 매카시즘(1950년대 초 미국을 휩쓴 반〈反〉공산주의 선풍)을 '마녀 사냥'이라는 은유로 풀어낸 연극이다. 사회 각계에서 서울대 출신임을 내세우려는 이들이 많지만, 연극계만큼은 그 '간판'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울대 나와서 도대체 왜'라는 편견 섞인 질문을 시도때도없이 받아야 한다. 이 극단은 지난해 극단 이름 앞에 넣었던 '서울대학교 연극동문회'라는 문구도 올해 떼버렸다. '서울대'가 주는 선입견을 지우고 싶어서였다.

철학과 54학번인 이순재는 "나도 남들처럼 대학원 갔으면 어디선가 교수를 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서라벌예술대에 갈 뻔했는데, 그랬으면 아마 배우로는 훨씬 수월하게 성공했을지도 모르죠, 하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을 하겠다며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명동의 다방 '동방살롱'을 기웃거리며 지냈다. 자신을 찾아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가 했던 질문을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야, 이거 꼭 해야겠냐." 이 연극에 참여한 거의 모든 단원은 모두 비슷한 질문을 수도 없이 들었다. 이들은 '배고픈 예술' 연극에 왜 이리 집착하는 것일까. 공연을 앞둔 관악극회 단원들을 만나 물었다.

◇심양홍(68): "나는 아직 반쪽짜리 배우예요"

이순재가 동방살롱을 드나들던 1960년대 어느 겨울날, 서울 동숭동 서울대의 한 강의실엔 국문과 학생 심양홍이 누워 있었다. 차갑게 식은 교실 난로 위 구공탄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심양홍은 생각했다. '내가 연극을 하느라고 부모님을 배반했는데, 나에겐 오로지 한 가지 연극뿐인데… 그걸 못하게 해? 내 인생은 끝났어!' 그는 잠이 들었다. 서울대 본부에서 예산 문제로 총연극회 공연을 취소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 연극회 회원 심양홍은 '연극 아니면 죽음'이라고 다짐한 후 자살을 결심한다.

"형! 왜 이렇게 추운 데서 자?" 어깨를 툭 치는 후배의 목소리에 눈을 뜬 심양홍은 너무 추워 벌떡 일어났다. "지옥인가 이승인가 싶더라고. 그런데 보니까 내가 살아 있어요. 유리창 귀퉁이가 깨져서 찬 바람이 쌩쌩쌩 들어온 거지." 심양홍은 대학 시절 연극에 미쳤던 자신을 '또라이'라고 불렀다.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만둔 심양홍은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연기라는 예술에 빠졌다. 학원에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고 1962년 영화 '청춘 교실'의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희곡·시나리오 쓰는 법을 가르치는 줄 알고 서울대 국문과에 들어간 심양홍은 자신의 기대와 동떨어진 학술적 수업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한 교수가 던진 "자네는 학문에 뜻이 없네"라는 말을 듣고 학업은 본격적으로 소홀히 했다. 대신 문리대 연극회, 총연극회 등 연극반 활동에 열심이었다. 졸업하고 연극을 포기할까 두려워서 교직 이수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스스로 퇴로를 차단한 거예요. 부모님이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다른 건 후회가 안 되는데, 불효한 것은 마음이 아프지…."

그는 졸업 후 국립극단에 들어간다. 기행(奇行)은 계속됐다. 20대 후반에 '징비록'의 동자승 역을 따내고 싶어서 캐스팅 오디션을 보는 날 머리를 거울처럼 밀고 나타난 적도 있다. 사람들이 "양홍이는 대단하다"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그때 한 선배가 그를 지하실로 끌고 갔다. 사이다·환타·콜라 마음대로 골라 먹으라고 했다. 당시로선 파격적 우대였다.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니까 '양홍이…'라고 지그시 불러. 그래서 '네?' 했더니 '그런데… 그 배역이 희곡에서 빠졌어' 그러는 거야. 장충동 빵집 태극당 옆 담에 기대서 소주를 여러 병 먹었지."

국립극단 봉급은 빠듯했다.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TV 드라마에 부지런히 출연했다.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하고서야 부모님은 마음을 풀었다. 그는 "처음엔 연기가 너무 안 돼서 애쓰다 보니 집착하게 됐는데, 이 연극이라는 게 아편 같아서 한번 빠져들면 나올 수가 없더라"고 했다.

"무대 위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서 연기를 하면 엄청난 희열이 느껴지거든. 그런데 그림이나 문학과 달리 배우에겐 막이 내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면 그 열락(悅樂)을 다시 맛보기 위해서 무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인간에겐 그런 게 있지 않나 싶어요. 달리고 싶은 예술적 욕망이라는 것…."

연기 경력 50년인 심양홍은 "나는 아직 반쪽짜리 배우"라고 자조했다. 그는 1998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작 '햄릿'에서 햄릿 아버지 폴로니어스 역을 맡았는데, 연출과 동료 배우들의 권유로 죽는 장면을 대사 없이 연기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는 게 이유다. "원래는 '오, 찔렸다'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우스워 보인다는 의견이 대세여서 '조용히' 죽었어요. 꼭 필요한 대사였는데 말이야. 배우라고 하는 건 다른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필요한 대사를 안 하면 안 되는 거라고요. 연기하는 순간 적절한 말이 튀어나와야 한다 이거야. 그래서 난 아직 반쪽이다 이거예요." 그는 얼마 전 10년 넘게 즐기던 조깅과 마라톤을 끊었다. "무릎이 안 좋아. 이제 내 다리와 몸은 다른 데 쓰지 않고 연극에, 무대에 서는 데만 쓸 거야."

서울대 연극동호회 출신들이 만든 극단 ‘관악극회’가 8월 초 어느 주말 서울 충정로에 모여 아서 밀러의 ‘시련’을 연습하고 있다.
서울대 연극동호회 출신들이 만든 극단 ‘관악극회’가 8월 초 어느 주말 서울 충정로에 모여 아서 밀러의 ‘시련’을 연습하고 있다. 배우이자 이번 연극에서 연출을 맡은 이순재(왼쪽에서 둘째)씨나 심양홍(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씨 같이 평생을 연기한 사람과 공대 졸업 후 대기업에서 일하다 은퇴한 정창옥(왼쪽에서 셋째)씨, ‘386 스타 강사’였던 김동범(심양홍 뒤 안경 안 쓴 사람)씨, 대기업을 그만두고 배우의 길을 택한 태영(흰 셔츠 여성)씨같이 다른 일을 하다가 무대로 돌아온 이들이 섞여 있다. 관악극회의 ‘시련’은 9월 5~14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 오른다. / 김연정 객원기자
◇정창옥(61):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잊지 않았다"

심양홍이 머리를 밀고 장충동에서 홀로 소주를 들이켤 즈음 서울대 금속공학과 72학번 정창옥은 친구 손에 이끌려 이런저런 동아리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교과서를 팠던 그는 이과와 무관한 대학 동아리 활동을 꿈꿨고, 건축학과의 한 친구 권유로 연극회에 들어갔다. 그는 연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넋을 잃었다.

"새로운 작품을 읽고 역할 배정을 받아서 인물을 분석하고… 거기에 조명, 음향, 배경이 더해져서 한 작품이 무대 위에 올려지는 그 감동을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죠.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인물로 살면서 먼 곳을 여행하는 그런 기분이랄까요."

대학 시절 했던 윌리엄 사로얀 작품 '혈거부족(穴居部族)'의 대사를 그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며 읊었다. "우리가 좀 더 둥글게 모여들면 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노인 역을 맡았을 땐 거리에서 지팡이 짚은 노인을 찾아내 미행해 가며 걸음을 연구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는 그러나 심양홍과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연극과의 절교'였다. "졸업하면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위기감이 온 거죠. 사회생활도 해야 하겠고…. 그래서 나름의 절제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는 졸업 후 현대중공업에 들어갔고 이후 독일계 자동차 부품회사 '콘티넨탈 오토모티브'에서 이사를 지낸 후 2009년 은퇴했다. 32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정을 꾸리고 두 아들은 안과 의사, 일식 요리사로 길렀다.

은퇴한 지 약 1년이 지난 그에게 다시 연극이 찾아왔다. 한 친구가 공대연극회 동문들이 모여 활동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연극을 떠난 후, 연극 하는 친구들도 멀리했던 그는 오랜만에 동문회 나가는 기분으로 모임에 나갔다. 거의 40년 만에 만난 친구들이 "너 어디 갔는지 참 많이 찾았다"고 하는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사람이 살면서 잊힌다는 것만큼 서글픈 게 없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나를 찾았다는 거예요. 얼마나 기뻐요."

정창옥은 지난해 서울대 공대연극회 출신 모임 '실극'으로 무대에 돌아왔고, 올해 '시련'에서도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았다. 본격적으로 연기의 감(感)을 되살리기 위해 '생활연극네트워크'라는 비영리단체에서도 연기를 공부하고 있다.

"30여년 만에 연극 무대에 다시 서면서 가장 기쁜 건 '그 시절의 나'를 다시 찾았다는 것이죠. 친구들이 나를 기억하고 있듯이 나도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놀랍지 않습니까."

◇김동범(46): '386 스타 강사' 먼 길 돌아 다시 무대로

정창옥이 대학에서 처음 연극을 만난 1970년대 초, 내성적인 '국민학생'(초등학생) 김동범은 서울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어린이 뮤지컬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을 황홀하게 보고 있었다. 캄캄한 암전(暗轉), 그리고 화려한 무대를 본 그는 무대 위를 동경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김동범은 총연극회에 들어갔다. "막연한 환상을 품고 살다가 대학 때 처음 연극을 해본 거죠. 1980년대 연극은 운동권의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고, 1학년 때는 '암전', '조명'과는 거리가 먼 마당극을 주로 했지요. 2학년이 되어서야 우리도 무대극을 하기 시작했는데, 아주 좋았죠. 열심히 했고."

전공 공부보다는 연극 동아리 활동에 빠져 있던 그는 졸업 후 선배들과 '그린 시어터'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당시엔 무명이었던 송강호, 추상미, 박광정이 배우로 참여했다. 관객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극장이 있는 건물 임대료를 낼 만큼 수익을 내지는 못했다. 1년 만에 부도가 났다. 그는 "안타깝게도 나에겐 '퇴로'가 있었다"고 했다. "당시 운동권 출신들이 학원가에서 인기였거든요. 학원에서 돈 벌어서 연극 쪽 유학을 가려고 저도 학원으로 뛰어들었죠. 그렇게 시작한 학원, 그리고 교육 관련 사업을 지금 20년째 하고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는 인기 강사가 됐고 교육 사업에도 손을 대 성공했다. 그가 만든 학원이 번창해 사업이 계속 불어나면서 연극과는 점점 멀어졌다. 그는 "돈은 충분히 벌었지만 한 번 실패한 경험 때문인지 직접 연극에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말했다.

관악극회가 만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반색했다. 지난해 이 극회의 첫 연극 '하얀중립국'에서는 조연을 맡았고, 올해 '시련'에선 프락터라는 주인공에 발탁됐다. 1990년 개봉한 노동영화 '파업전야'에서 주인공인 비쩍 마른 가난한 노동자 '한수'를 맡았던 '학생 배우 김동범'은 어느새 40대의 '배 나온 학원 원장님'이 되어 있었다. 농부 역을 위해 그는 술을 끊고 다이어트에 돌입해, 한 달 만에 5㎏을 뺐다. 그는 20여년 만에 무대 위에 서는 느낌을 '번지 점프와 비슷한 쾌감'이라고 표현했다.

"계속 연기를 하지 않았다고 후회하지는 않아요. 몇 년 하다가 가난이 지겨워져, 결국엔 경영학과 나온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 살았을지도 모르잖아요. 월급의 달콤함에 빠져 살다가 지금쯤 삼성 같은 데서 임원 되려고 무지 애쓰는… 그런 삶 말이죠."

◇태영(30): "재미도, 의미도 없는 대기업 싫었다"

연기자의 꿈을 품었던 김동범이 학원가의 '큰 손'으로 자리 잡은 2000년대 중반, 태영(가명)은 서울대 지구시스템과학과를 졸업했다. 소녀 시절 화려한 연기자들을 보고 막연히 연기의 꿈을 품었던 그는 대학 때 연극 동아리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그러나 전업 배우로 나설 정도는 아니라고 여겼다. 무엇보다 공부 잘하는 딸에게 어릴 때부터 '번듯한 미래'를 기대했던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여느 친구들처럼 대기업에 들어갔다. 안정된 삶에 정착하는 듯했던 그는 8개월 후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다. "아무 의미도, 재미도 못 찾겠는 거예요. 그래서 의미는 일단 제쳐놓고 '재미'를 찾아보자는 생각에 대학 시절 너무나 즐겁게 했던 연극으로 돌아왔죠."

바로 연기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대신 그는 '공부를 더 하겠다'는 말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대학원에서 예술경영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연극·무용과 친구들과 어울려 무대에 섰다. "즐거웠어요. 나는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살 때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는 요즘 독립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생계는 과외를 해서 해결한다. 후회는 없지만 아직 아버지에게는 본업(本業)을 밝히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금 제가 교수님 아래서 예술 경영과 관련한 연구를 하는 줄 아세요. 딸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했던 분이기에 아버지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아직 고민 중입니다."

제각각 다른 삶의 길을 거쳐 무대에 모인 이들은 9월 5~14일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시련'을 선보인다. 심양홍은 마녀 재판의 책임자 '댄포스', 정창옥은 거짓 진술을 거부하다 압사형을 당하는 '가일스 노인', 김동범은 거짓 자백 대신 죽음의 길을 택하는 농부 '존 프락터', 태영은 마녀 의식에 대해 증언하는 프락터의 십대 하녀 '메어리 워런'을 맡았다. 이순재는 이들을 지휘하는 연출이다. 정창옥씨는 말했다. "인생과 연극 모두 '배역'은 고르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회만 준다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막이 올라갈 수 있는 동안에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