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14 10:32
15년간 몸담았던 국립발레단에서 나와 홀로서기 스텝을 밟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발레리나 김주원의 행복 찾기.
청계천이 초록으로 뒤덮인 초여름 어느 날. 발레리나 김주원이 자신의 얼굴보다 큰 아이스커피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한국관광공사 건물을 찾았다. 매달 넷째 주 목요일 오후, 서울문화연구원에서 열리는 ‘행복찾기 포럼’의 강연자로 참석한 것이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편안한 실루엣의 캐주얼한 옷차림이지만, 야무지게 묶은 머리와 꼿꼿하게 세운 상체에서 발레리나 특유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딘지 모를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국립발레단을 나온 그녀는 요즘 활동 영역을 넓혔다. 발레뿐 아니라 뮤지컬, 방송, 대학 강단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얼굴을 보이고 있다. 발레리나 중에선 처음으로 프리랜서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그녀였지만, 영역이 넓어지면서 인지도도 훨씬 높아졌다.
세련된 깍쟁이처럼 생긴 그녀는 부산에서 태어난 경상도 아가씨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인 발레리나의 삶이 시작됐다.
“부산에서는 달맞이고개 근처에 살았어요. 해운대가 바로 옆에 있어서, 4남매가 매일 학교만 끝나면 튜브를 들고 바다에 가서 놀다오는 게 일이었어요. 발레를 조금 늦게 시작해서, 그전에는 터프하게 놀았죠.”
그녀가 발레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예체능 교육을 중시한 부모님 덕에 어려서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그림 등 다양한 분야를 접했어도 크게 재미를 느끼진 못했는데 발레는 재미가 있더란다. 그렇게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그녀는 선화예중에 입학했다.
남자 형제들과 어울려 놀던 터프한 그녀가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받은 문화적인 충격은 컸다. 일단 바다가 없는 삶의 스트레스가 굉장히 컸고, 새침데기 서울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는 무뚝뚝한 경상도 스타일인데, 친구들은 공주도 그런 공주가 없는 거예요.(웃음) 게다가 제가 다닌 학교는 예술을 전공해서 아이들 하나하나 개성이 정말 강했죠. 사투리를 고치는 것도 힘들었어요.”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참관한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의 특강을 계기로 러시아 유학을 가게 됐다. 이후 볼쇼이발레학교에서 7년 동안 발레수업을 받았다. 98년 귀국 후에는 국립발레단 <해적>의 주역으로 국내 무대에 데뷔했다. 러시아 생활은 힘들었지만, 평생 그녀를 지탱해주는 자양분이 쌓인 시간이었다. 덕분에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인 러시아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최고여성무용수상을 수상하면서 국내 최고의 발레리나로 두각을 나타냈다. 모교인 볼쇼이발레학교 복도에는 그녀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다.
발레리나의 홀로서기
예술은 영원하지만 무용수에게는 생명이 있다. 최근엔 그 기간이 길어져서 40대를 웃도는 주역들(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 강수진,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줄리 켄트 등)도 있지만, 여전히 20~30대가 되면 무용수의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30대 중반의 김주원은 지난해 6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을 뗐다. 국립발레단이라는 울타리에서 생활한 지 15년 만의 일이다.
“쉬지 않고 달렸어요. 주위를 곁눈질할 틈도 없이요. 국립발레단의 삶이란 게 생각보다 타이트하게 굴러가거든요. 물론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날 수는 있겠지만, 2~3일 준비해서 한 작품을 올려야 할 정도로 치열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해요. 어느 순간 주위가 보였어요. 나와 호흡을 맞추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었고요.”
<지젤>,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호두까기 인형> 등 유수의 작품을 주역으로 소화한 그녀다. ‘우아한 선’과 ‘섬세한 연기’는 그녀가 대중에게 받는 단골 찬사. 그런 그녀지만 매일 같은 패턴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되어버리니 어떤 벽을 느꼈다. 한 작품을 긴 호흡으로, 정성을 들여서 독창적으로 만들고 싶은 예술가로서의 욕심도 생겼다.
새롭게 시작한 일은 뮤지컬부터 대학교수, 방송까지 영역이 넓다. 그중 가장 대중적인 것을 꼽으라면 MBC 예능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 시즌 3>의 심사위원.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발레에 문외한인 일반인들도 발레리나 김주원을 잘 알게 되었다.
무대에 올릴 공연을 선택하고 기획하는 일도 한다. 혼자 무언가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벽에 부딪히는 일이 많지만, 인생의 방향을 새롭게 잡아서 설계해가는 과정이 재미있다.
“발레단에서는 휴가를 제대로 보낸 적이 없어요.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휴가가 주어지는데, 그때는 꼭 다른 일을 해야 해요. 전 시간이 여유롭게 주어지면 몸살이 나는 타입이에요.”
일종의 강박, 불안으로 다가와서 치료를 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는데 발레단을 나오면서 생활의 패턴이 조금 달라졌다. 활동 영역이 넓어져서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그만큼 자신을 위한 시간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다보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중이에요. 최근 남산 근처로 이사를 했는데, 남산을 걷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요. 주말에는 코스가 있어요. 남산에 올라갔다가 산책로를 걸어 명동으로 내려가 곰탕 한 그릇을 사먹고 집으로 오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지만, 완벽한 몸매를 가진 발레리나들은 굉장히 잘 먹는다. 활동량이 많으니 먹는 양이 많을 수밖에 없다. 김주원은 ‘힐링은 먹는 것으로 한다’는 철학을 가졌을 만큼 먹는 것을 좋아한다. 무대를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 자체를 즐기는 미식가 스타일이다.
“외국 친구들이 많아요. 서울을 방문하면 제가 맛있는 곳을 직접 안내해줍니다. 그들도 주로 무용수들이고 저처럼 먹는 것을 좋아해서, 다들 좋아해요. 서울의 음식을 아주 사랑하지요.”
외국 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한국 음식이다. 맛집도 줄줄이 꿰고 있다.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외국 사람들에게 한식을 세련된 느낌으로 선보이고 싶을 때 ‘비스트로 서울’에 갑니다. 삼성동에 있는 곳이에요. 최근에 자주 가는 곳은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세레브 데 토마토’라는 곳이에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즐겨 찾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클래식 공연은 10년에 한 번 본다고 해요. 그런데 발레는 15년에 한 번 본다고 합니다.(웃음) 아무리 좋은 예술이라도 관객이 있는 것이 중요해요. 발레리나인 만큼, 발레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에요. 전 국민이 발레를 보는 날까지 제 얼굴을 보여주고 많은 발레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요.”
클래식 공연, 그중에서도 무용이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소외받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깨기 어려운 높은 벽이지만,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고 싶다.
순수 클래식 공연도 필요하지만 새로운 시도로 관객들에게 다채로운 장르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에 특히 공감한다.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하면 관객과 좀 더 가깝게 호흡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하느냐다.
“몸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라서 몸으로 익힌 언어도 많이 알아야 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다방면에 대한 경험과 공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역의 경계를 두지 않고 최대한 다양한 것을 경험하려고 합니다.”
최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봉사가 더해진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나누는 삶에 대한 갈망이 크다. 좀더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싱글 여성이 피할 수 없는 질문, 결혼이다. 지난해 뮤지컬배우와 한 차례 열애설이 있었던 그녀다.
“개인적으로 연하는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웃음) 아직은 일과 저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아요. 이 생각을 바꿔줄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겠지만, 아직은 없네요.”
결혼보다는 새롭게 시작한 인생 2막과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훨씬 크다는 그녀의 웃음이 해맑다.
행복찾기 포럼
‘함께 즐기자, 서로 섞이자, 새로 만들자, 많이 나누자’라는 모토로 출발한 서울문화연구원(대표 함영준)의 포럼. 문화예술계 명사를 초청해 좌담 콘서트를 진행한다.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나머지는 듣는 형식이 아니라 청중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다중소통 방식이다. 포럼 일정은 매달 넷째 주 목요일 오후 7시, 참가비는 1만원(샌드위치·음료 제공)이다.
문의 010-2240-0357
김주원 프로필
1978년 출생
1997년 모스크바 볼쇼이발레학교 졸업
1998~2012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2012년 제20회 러시아 브누아 드 라 당스 심사위원
2012년 6월~현재 국립발레단 객원 수석무용수
2012년~현재 성신여자대학교 무용예술학과 전임교수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임언영 기자 | 사진 방문수, 떼아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