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사량도 섬마을 콘서트 연 피아니스트 백건우

입력 : 2013.07.17 13:44

거장이 만들어낸 여름밤 감동의 선율

건반 위를 순례하는 거장, 세계를 빛낸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섬마을 콘서트를 열었다.
섬에서 나고 자라 언젠가 섬에서 연주를 하고 싶다는 그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예술가의 오래되고 근사한 꿈 덕분에,
클래식이 낯설기만 한 섬사람들이 꿈같은 여름밤을 보냈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던 사량도 바닷가 콘서트 현장에 직접 다녀왔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


“백건우 씨 공연 보러 왔는데, 이따가 나올 때는 몇 시로 예약하면 됩니까?”


경남 통영의 사량도는 서울에서 버스로 4시간, 배로 또다시 40분을 들어가는 섬이다. 6월 7일 오후 12시 반, 사량도로 들어가는 배가 운행되는 경남 통영의 가오치항은 사람들로 붐볐다. 2시간에 한 척씩, 홀수 시간마다 운행되던 배가 오늘만 한 시간에 한 척씩 운행된다는데, 그래도 인산인해다.


거장 백건우의 섬 음악회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방문했다. 기자 역시 겨우 표를 끊고 배에 올랐더니 인기 좋은 야외 의자는 이미 만원이다.


“우리는 서울에서 왔어요. 백건우 선생님이 음악회를 한다기에, 친구들이랑 여행도 할 겸 계획을 세워서 왔지요. 친구 셋이서 민박집 예약까지 해뒀어요.”


“클래식 공연은 우리 같은 서민이 보기에 부담스럽잖아요. 특히 백건우 선생님 연주는 돈이 있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사는 동네에서 이렇게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당연히 와서 봐야죠. 무료잖아요. 저는 통영 사람이에요.”


“우리가 윤정희 씨랑 동갑이거든. 실제로 만나면 어떨지 정말 궁금하고 기대돼요. 옛날에 진~짜 잘나갔는데.”(웃음)


아이들도 꽤 많다. 5살짜리 아들을 안고 있는 한 주부는, 아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공연이라 아이와 단둘이 아침 일찍 나섰다고 한다. 아이가 음악회를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참에 백건우라는 예술가와 클래식 연주의 맛을 보게 해주고 싶단다.


대부분 등산복 차림, 고상한 클래식 음악회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다들 들뜬 얼굴로 사량도를 향하고 있다. 온 김에 등산도 하겠다는 사람들부터 백건우 선생의 연주 CD를 들고 있는 사람들까지. 피아니스트의 재능 나눔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설렘을 주고 있다.



거장의 오래된 꿈, 섬 음악회


지난 20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되는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는 클래식 문화를 쉽게 접하기 어려운 섬마을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연주를 들려주는 일종의 나눔 콘서트다. 2년 전에는 연평도, 위도, 욕지도 주민들에게 따뜻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선물했고 올해는 울릉도와 사량도에서 무대를 준비했다. 연주 스케줄이 빽빽하게 잡혀 있어서 일 년 단위는 아무래도 무리란다.

1 공연장으로 가는 길, 백건우의 사진으로 섬 음악회의 분위기가 더욱 로맨틱해졌다. 2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공간, 백건우 실사가 서 있는 기념촬영 장소.
1 공연장으로 가는 길, 백건우의 사진으로 섬 음악회의 분위기가 더욱 로맨틱해졌다.
2 관람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공간, 백건우 실사가 서 있는 기념촬영 장소.

부산의 섬에서 나고 자란 백건우는 섬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생활하고, 세계를 무대로 연주 여행을 다니는 예술가로 살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있는 섬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섬 음악회는 개인적인 욕망이에요. 오래전부터 그렸던. 좀 더 깊숙하게 한국을 알고 싶고, 만나보고 싶고, 다시 찾고 싶은 마음도 커요. 이걸 이용해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음악으로 교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 개인적인 꿈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 덕분에 이번에도 기분 좋게 스케줄을 잡았다. 음악회에 방문한 관객만큼 연주자 역시 좋았던 모양이다.


“재작년 첫 번째 섬 음악회의 기억이 정말 좋았어요. 파도 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하는 연주는 색다른 경험을 했어요. 소리가 완벽하지는 않아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섬 음악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해요.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요.”(웃음)


5일 전, 울릉도에서 가진 첫 연주는 다소 역동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아이들이 많아서 조금은 어수선한 감도 있었지만, 나중에 연주를 즐기는 애티튜드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울릉도는 남성스러운 느낌이, 사량도는 아기자기하고 잔잔한 느낌이 강하다며 섬에 대한 예찬을 펼쳤다. 연주를 다니면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그곳을 즐기는 그는 통영의 맛있는 음식을 기쁘게 즐기고, 또 다른 섬 여행을 하면서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공연 3시간 전, 리허설도 실전처럼


“저기 소가 한 마리 있네요? 이따가 연주할 때 이중창하면 안 되는데.”(웃음)


공연 3시간 전, 리허설을 위해 무대를 찾은 백건우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주변을 살폈다. 소리가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 이 영민한 아티스트의 촉각은 벌써 3시간 후에 있을 무대에 도착해 있다. 작은 차이 하나에도 피아노 소리는 천차만별로 달라지기에, 완벽한 위치 선정과 조율에 대한 치열한 고민은 당연한 일. 섬 음악회는 2년 전의 경험을 살려, 전깃줄에 앉은 참새에게도 온몸의 감각을 집중해서 미세한 음악을 맞춰나가야 한단다.


“오늘이 섬 음악회 다섯 번째예요. 할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장소마다 느낌이 달라요. 섬마다 조금씩 다른데, 남쪽 섬은 또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요. 오늘은 저쪽 산에 올라갔다 왔는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근사해요. 노을이 지는 것도 좋고요.”

1 진지한 모습으로 리허설 연주 중인 거장 백건우의 모습. 2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걸어나오는 백건우·윤정희 부부.
1 진지한 모습으로 리허설 연주 중인 거장 백건우의 모습. 2 무대의상을 갈아입고 걸어나오는 백건우·윤정희 부부.

무료 공연이지만 최상의 무대라는 점이 백건우 섬 음악회의 백미다. 어떤 환경에서도 최고의 음악을 만드는 것이 연주자의 기본이라는 그의 철학 덕분이다. 청중에게 약속을 했으면 최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그것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하려고 한다. 이번 연주는 최고의 조율사 덕분에 보다 완벽한 소리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백건우는 바흐부터 리스트에 이르기까지 레퍼토리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이번에는 모두 3곡을 연주하는데 베토벤의 〈피아노 소타나 제8번 ‘비창’〉, 쇼팽의 〈야상곡 제1번〉, 리스트의 〈순례의 해:‘베네치아와 나폴리’〉다.



2천5백여 주민들로 꽉 찬 감동의 무대


리허설일 뿐인데 관객들은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면서 거장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입장까지 한참 남았는데 서서 기다리는 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다.


이번 행사를 총주관한 MBC에 확인 결과, 이날 음악회를 찾은 관객은 대략 2천5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의자 1천 석을 준비했는데, 바닥에 앉거나 서서 감상하는 사람이 두 배 가까이 되었다. 관객들의 입장 시간이 길다보니 연주회 시작 시간도 살짝 늦어졌다.


7시로 예정되었던 무대는 7시 30분이 되어서야 시작됐다. 그의 피아노 선율이 잔잔하면서도 힘 있게 울렸다. 석양이 걸쳐진 잔잔한 바다 위에는 작은 배들이 조명을 켜고 둥둥 떠 있다. 그리고 6월의 시원한 바람까지. 그 많은 관객들이 순식간에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자리가 없어서 원성이 자자하던 어른들도, 칭얼대는 아이들도 어느새 두 눈을 감고 음악과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특별한 곡 설명 없이 조용하게 시작된 연주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몰입하는 광경을 보니, 섬 음악회의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나는 듯했다.


50여 분 정도 쉼 없이 내달린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앙코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쳤다. 섬과 백건우와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집중을 잘해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도 질서가 잘 지켜지는 게 놀랍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저도 몰입해서 연주할 수 있었어요. 무대가 매우 아름다워서 더욱 좋고요.”


한편 연주가 끝난 후 사량도 마을회관에서는 자신들의 고장을 찾아준 거장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작은 리셉션 시간을 가졌다. 주민들이 직접 막걸리를 비롯한 음식을 마련해서 마을잔치를 열었다. 마음이 담긴 소박한 대접에 또 한 차례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고서야 섬 음악회는 마무리되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


한 사람을 위한 연주, 찾아가서 들려주는 연주…
거장의 특별한 나눔


“음악은 일대일이에요. 사회적인 위치를 떠나 똑같은 위치에서 볼 수 있을 때 대화가 가능해요. 그런 대화를 위한 매개가 꼭 음악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제 마음가짐은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순수한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함께 기뻐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어요.”


백건우의 화법에 정의를 내리자면 ‘꼭 필요한 말만, 조용조용 속삭이듯’ 한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드물게, 길게 설명을 붙여왔다. 예술가로서 소명을 잘 실천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을 바로잡고 싶었나보다. 그는 모든 것의 출발은 순수한 마음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제가 추구하는 건 진실한 만남이에요. 그게 점점 귀해지니까.”


울릉도 공연이 끝난 다음 날, 그는 한 사람을 위한 음악회를 열었다. 울릉도에서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죽도에서 혼자 살고 있는 주민 김유곤 씨 그를 위한 음악회다. 유곤 씨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지만, 자신마저 이 섬을 떠나면 무인도가 된다는 생각에 혼자 섬을 지키는 주민이다. 백건우는 그의 집 마루에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아서 그의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매기의 추억’을 연주해줬다. 김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10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피아노 소리”라며 눈물을 흘렸다. 피아노 연주가 이렇게 감동적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사량도 공연 후에는 수우도를 찾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 사는 주민은 6명. 평생 섬을 벗어나본 적 없는 주민들을 위해 직접 피아노를 들고 찾아갔다. 난생 처음 만나는 피아노 연주에, 수우도 주민들 역시 감동의 시간을 보냈다.


백건우는 스스로 말한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진실한 만남’을 그렇게 충실히 이행하고 갔다. 거장의 이번 여정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로 제작된다. 드라마 <궁>, <돌아온 일지매> 등을 연출한 황인뢰 감독이 여정을 함께한 덕분에, 기존의 다큐 프로그램과는 차별화된, 영상미가 더해진 ‘아트 다큐멘터리’가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6월 말 방송될 예정이다.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임언영 기자 | 사진 유진행 | 취재 협조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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