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예산·청중 없어 논다는 35억짜리 악기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3.06.23 23:51

세종문화회관 파이프오르간

파이프오르간.
어른 새끼손톱 크기부터 아파트 3층 높이까지, 8098개의 파이프에서 폭포수처럼 쏟아내리는 음(音)의 향연에 청중들은 압도당했다.

2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파이프오르간 연주회. 미국 출신 오르가니스트 네이슨 라우베와 신동일 연세대 교수는 오르간 곡 중 가장 유명한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로 '배틀'을 벌였다. 신 교수가 엄숙하고 절제된 전통 스타일로 토카타를 연주하자, 라우베는 음색을 바꿔가며 화려한 연주로 맞받았다. 푸가 부분은 라우베가 먼저 연주를 시작하고, 오른쪽에 서 있던 신 교수가 중간에 끼어들어가 연주하다 일어서고, 라우베가 뒤를 이어가는 식이었다. 두 사람은 재즈 멤버들이 즉흥 연주를 주고받듯, 45t짜리 오르간을 공깃돌처럼 다뤘다.

이날 연주에는 18세기 초 바흐부터 디즈니 애니메이션 '환타지아'에 삽입된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까지 오르간 음악이 총출동했다.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를 연주할 때는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 같은 장엄미까지 느꼈다. 페달을 밟는 연주자의 현란한 발놀림까지 영상으로 비춰준 덕분에 축구 중계 보듯 실감났다.

지난 2008년 시작된 세종문화회관의 파이프오르간 시리즈는 매년 유료 관객 1500명을 넘기는 인기 레퍼토리다. 하지만 이 오르간<사진> 소리를 들어본 이는 많지 않다. 연 1회 기획 공연과 한두 차례 대관 공연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당시 설치된 오르간 도입가는 당시 돈으로 125만달러(약 6억원). 현재 가치로 35억원(세종문화회관 추산)짜리 오르간을 1년에 두어번 쓰는 것이다.

'공연 예산을 마련하기 어렵다' '3000석이 넘는 공연장을 채울 청중이 없다'…. 세종문화회관은 이런저런 이유를 댄다. 하지만 이 비싼 악기를 놀리는 것은 회관 측의 경직된 운영 방식과 무책임 탓이 크다. 세종문화회관의 말처럼 국내에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한 공연장은 거의 없다. 그걸 놀리니, 모차르트, 베토벤 음악 같은 음악만 편식하는 우리 음악계 입맛이 변치 않는 것이다. 20세기 들어 오르간으로 편곡하거나 새로 쓴 작품들은 쏟아져 나온다.

서구의 유명 콘서트홀은 물론, 일본 도쿄의 산토리홀이나 신주쿠의 오페라시티는 매달 한 차례씩 무료 '오르간 콘서트'를 연다. 파이프 오르간을 활용하고, 클래식 음악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다. 세종문화회관도 서울 광화문 도심이라는 이점을 살려 평일 점심 직장인을 위한 '무료 오르간 콘서트'나 LG아트센터의 '러시아워' 콘서트처럼 퇴근길 오르간 공연을 기획하면 어떨까. 상주 오르가니스트를 초빙, 체계적인 연주 프로그램을 짜는 것도 대안이다. 공연 좀 본다는 이들은 죄다 강남으로 몰려간다. 강북 주민의 음악 향수(享受)권을 위해서라도 세종문화회관이 결단을 좀 내렸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