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개그, 몸놀림은 아트… 이 배우 고창석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06.23 23:43

['보이첵'으로 5년 만에 연극]

데모하고 탈춤 추던 20대, 아내와 함께 대학 다시 진학
막일·공장… 한때 '알바 황제'
독특한 개성에 '조연 블루칩' "날 위한 연기, 무대서만 가능"

‘보이첵’에서 중대장으로 나오는 고창석의 모습.
‘보이첵’에서 중대장으로 나오는 고창석의 모습. /명동예술극장 제공
지난해 말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를 공연 중이던 이화여대 삼성홀은 이 배우가 나올 때마다 '빵빵' 터졌다. 가느다란 지팡이에 푸짐한 몸을 힘겹게 의지한 고창석(43)이 비틀거리며 등장하면, 미처 대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폭소가 쏟아졌다. '몸이 이미 코미디'라는 찬사(?)를 듣는 그가 내달 3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하는 '보이첵(Woyzeck·사다리움직임연구소)'으로 5년 만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선다.

그의 몸은 '보이첵'에서도 경탄을 끌어낸다. 의자에 앉아 무료하다는 듯 배를 긁고 있는 그(중대장 역)에게 서너 명이 다가온다. "붓기가 있네", "목이 굵네"라며 감탄하다 "신비로운 몸매"라며 일제히 에워싼다. 독일 현대 희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그 뷔히너의 '보이첵'은 말단 병사 프란츠 보이첵이 바람난 아내를 죽이고 자살하는 기둥 줄거리에 계급 사회에 대한 통찰을 담은 문제작. 리듬체조 선수가 리본으로 허공에 선을 그리듯 배우 11명이 의자 11개를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폭력적으로 신체의 일부처럼 활용한다. 대사가 많지 않아 무용극 같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들 법하다. '그렇게 몸을 많이 쓴다면 고창석이 과연?' 날렵하게 걸상을 들고 흔드는 고창석의 모습은 고된 훈련의 결과물이자, 배우의 신체가 작품에 흡수되는 과정이다.

1989년 부산외대 일본어과에 들어간 그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목표보다는 비겁하게 살고 싶지는 않아서" 데모를 열심히 하다가 3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풍물패에 들어가 미친 듯이 탈춤을 추다가 노래패에 들어가 민중가요를 부르고, 극단에서 연극을 하다가 기로에 섰다. 아예 다른 길을 갈까 고민하다 서울예대 연극과에 들어간 것이 고교 졸업 10년 만인 1998년이었다.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 이정은(40)씨와 나란히 응시해 같이 합격했다.

30대 후반에 '뜨기' 전까지 고창석은 '알바(아르바이트)의 황제'였다. 일용직 막노동은 기본. 음료수 '갈아 만든 배' 공장에서는 아주머니 수십명 사이에 끼어 흰 위생모를 쓰고 배를 깎았다. 철공소에서는 쇠띠 담당으로 철근을 갈았다. 가장 힘든 곳은 김 양식장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그물을 던져 김을 끌고 들어와야 했다. "작은 배에서 몸을 굽히고 계속 당기려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고 했다. 볼쇼이서커스단에서 좌석 배치 알바를 할 때는 "곰이 아플 때 대신 나가려는 것 아니냐"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도 들었다.

20일 연극 '보이첵' 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고창석.
20일 연극 '보이첵' 공연장인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고창석은 연말에 아내 이정은씨와 단 둘이 출연하는 소극장 연극을 올릴 예정이라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그는 영화계에서도 '조연 블루칩'으로 꼽힌다. '친절한 금자씨'의 단역(금자씨에게 총을 만들어주는 기술자)으로 시작해 현재 상영 중인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주연보다 빛나는 연기를 보이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해 어디 가나 알아보는 얼굴이 됐다.

장르를 넘나드는 배우에게 "돈 안 되는 연극을 왜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살아있는 무대가 좋아서"라는 '정답'을 주로 말한다. 고창석은 "사랑해서 한다는 건, 저한테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제가 배우니까 하는 거예요. 영화와 드라마는 소비적이거든요. 제가 가진 이미지를 그 사람들(제작사)이 사서 쓰는 거죠. 영화는 연습이 없어요. 감독이 마음에 안 들 때 언제든지 '한 번 더' 하죠. 연극은 '한 번 더'가 없어요. 그러니 똑같은 장면을 천 번씩 만 번씩 지루하게 연습해야 하죠. 그런 게 생산적인 거예요. 배우가 살아남으려면 연습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고창석은 몸이 좋은, 그 안에 정신은 더 좋은 배우다.

▷연극 '보이첵'&'휴먼코메디' 7월3~27일 명동예술극장,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