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오케스트라'의 몽키 티처, 리처드 용재 오닐

입력 : 2013.06.19 17:06

“I’m so proud of you…
나는 너희가 정말 자랑스러워”

지난 12월 30일.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울려퍼졌다. 그 옆에는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함께했다. 용재 오닐과 아이들이 일궈낸 지난 1년의 기적,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들을 보고 미소짓은 리처드 용재오닐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이 이런 말을 했다.
“작품을 연주한다는 건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를 공유하는 거예요. 음악은 결국 ‘나눈다’는 것이니까요.”
그는 음악을, 정확히는 그가 하는 클래식 음악을 소수의 청자가 아닌 더 많은 대중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엘 시스테마(베네수엘라의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 같은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달라”는 이보영 PD의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좋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다문화 가정에서 올 거라고 했어요. 고민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죠. 물론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들을 3개월 만에 무대 위에 올린다는 것은 모험이었어요.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충분했죠.”
그렇게 <안녕?! 오케스트라>는 시작됐다.

아이들을 지도하는 리처드 용재오닐
치열했던(?) 오디션 좌충우돌 첫 만남

2012년 3월 24일. 오케스트라의 첫 단추를 꿰는 자리, 오디션이 열렸다. 멀리 LA에 있는 용재 오닐은 영상통화로 심사에 참여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이게 웬일. 스물다섯 명의 인원을 뽑는 오디션 현장에 서른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 참가자들만이 모습을 비췄다. 실망스럽다 못해 민망한 숫자였다.
“현악기를 쥘 수 있는 팔 길이가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선발됐어요.”

선발 기준은 음악적 재능도 열정도 아닌, 최소한의 신체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질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오케스트라를 하게 되면 연습시간은 토요일과 수요일이 될 거예요. 근데 토요일 오후에는 친구들 생일파티가 많잖아. 생일파티와 연습시간이 같은 날 겹쳤어요. 그럼 어디로 갈래요?”
진지하게 고민하던 아이들은 생일파티를 포기하고 연습을 택했다. 그렇게 추려진 스물다섯 명의 아이들이 최종 단원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들과 용재 오닐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처음엔 한국말을 잘 못하는 용재 오닐을 매우 어색해했다. “무섭다”며 피해 도망가는가 하면, 한국말을 못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반쪽 사람’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언어 문제가 컸죠. 또 한창 떠들썩할 나이의 아이들이다보니 (컨트롤하기) 쉽지 않았어요. 처음엔 정말 난감했고 나중엔 불안하기까지 했어요.”
하지만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강당에서 정신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위해 용재 오닐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비올라였다. 그리고 연주 전, 아이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여러분 나이 때 나는 이렇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될 줄 몰랐어요. 음악과 비올라가 나를 변화시켰죠. 비올라 덕분에 외롭지 않았고,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고, 전 세계를 여행했어요. 여러분도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악기를 만나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용재 오닐은 짧은 연주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흐였다. 17세기 독일에서 태어나, 18세기 서양음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바로크 음악을 완성한 귀재.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곡은 시끄럽던 아이들을 일순간에 주목시켰다. 아이들의 시선이 비올라를 연주하는 용재 오닐의 손가락에, 얼굴에 고정되었다.
“처음엔 그냥 보통인 줄 알았는데…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진짜 좋은 음악이 나왔어요!”
“소리가 꼭 흘러내리는 것 같아요.”

“악기의 고수!”
아이들은 하나같이 칭찬을 쏟아냈다. 용재 오닐은 분신과도 같은 악기를 아이들이 직접 만져볼 수 있게 보여주었다. 이렇게 아이들과 용재 오닐은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기 시작했다.

원태야, 기운 내! 나처럼 말이야

<안녕?! 오케스트라>는 10개국 부모의 아이들이 모인, 과장 조금 보태면 축소판 지구촌이다. 필리핀, 키르기스스탄, 콩고, 중국,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등 얼굴색이 전부 다른 아이들이 우연한 기회로 이곳에 모였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기가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용재 오닐은 너무도 잘 안다. 그 역시 미국으로 입양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입양아 2세이기 때문이다.
<안녕?! 오케스트라>에는 원태라는 아이가 있다. 팀 내 제2 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원태는 태어나자마자 아빠와 헤어졌다. 남은 엄마마저도 일 때문에 떨어져 살고 가끔 만나는 정도. 사실상 조부모가 원태를 맡아 키우고 있다. 용재 오닐은 그런 원태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곤 했다.

“제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란 존재는 없었어요. 견디기 힘든 고통이고 서러움이었죠. 하지만 악기로 그 고통을 치유했어요. 원태도 음악이라는 도구를 통해 그 독을 내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물론 음악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대신할 순 없지만,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 아닐까요? 삶이라는 건 그렇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니까요.”

아이들 지도하는 모습과 무대에서 연주하는 리처드 용재오닐
1년의 기적 감동의 오케스트라

<안녕?! 오케스트라>의 첫 번째 목표 무대는 지난여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디토 페스티벌의 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날 용재 오닐은 처음으로 마에스트로란 이름을 달고 무대에 올랐다. 24명(25명 중 한 멤버가 집안 사정으로 중도 포기했다)의 아이들 역시 3천 명 관객 앞에 긴장되는 첫발을 뗐다.
“지금부터 아주 특별한 오케스트라를 소개할게요. 3개월 전, 저는 24명의 아이들과 처음 만났습니다. 아이들은 그날 처음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 알게 됐죠.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악기를 가졌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처음 연주하던 날, 반짝이던 그들의 눈동자를 잊지 못합니다. 정말 행복했어요. 아이들은 저를 용재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용재 오닐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북받치는 감정에 그만 울컥한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울음을 삼키느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제가 아이들에게 더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 아이들은 처음으로 관객 앞에서 연주를 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오케스트라의 첫 관객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무대를 지켜봐주세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암전. 지난 3개월의 여정을 담은 영상이 소개된 뒤 곧 첫 번째 무대가 시작됐다.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이었다. 3분짜리 곡이 마치 40분짜리 교향곡처럼 길게 느껴진 순간. 아이들의 가족, 선생님, 관객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람들은 눈물을 닦기 위해 휴지를 꺼내들었다.

공연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틀리기도 하고 불협화음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감동이 밀려왔다. 아이들의 진심과 열정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감격한 용재 오닐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지휘를 마쳤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이 이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 울려퍼졌다.

“I’m so proud of you… 나는 너희가 정말 자랑스러워.”
7월 공연을 무사히 마무리한 뒤 아이들의 사기는 한층 높아졌다. 이제 연말 공연만 남겨둔 상태. 12월 30일에 개최될 단독 콘서트의 제목은 <엄마의 자장가>로 정해졌다.
당일 아침, 폭설이 내리고 기온은 영하 10도 아래로까지 떨어졌지만 살을 에는 한파에도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날 참이었다. 이날 용재 오닐은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2004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다시 찾는 어머니였다. 지적장애를 가진 어머니는 용재 오닐이 어린 시절부터 돌봐온 대상,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다.

“제 어머니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굉장히 좋아하세요. 어머니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만 들어도 저는 제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으셨거든요. 오늘 제 연주가 제 어머니와 여기 계신 모든 어머니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 엄마, 잘 들어주세요.”
그리고 용재 오닐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주가 시작됐다. 연주하는 그의 눈에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디토 페스티벌, 들어보셨나요?

용재 오닐이 음악감독으로 있는 클래식 연주 페스티벌. 클래식을 쉽고 편하게 즐기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올해의 테마는 ‘시티 오브 바흐(City of BACH)’, 바흐를 연주한다. “바흐는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을 천재입니다. 곡 안에 인간의 모든 감정을 담고 있죠. 연주할 때마다 매번 퍼즐을 푸는 느낌이에요.” 오는 6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디토 페스티벌에서 새 얼굴을 만날 수 있다. “피아니스트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를 주목해주세요. 클래식과 일렉트로닉을 흥미롭게 엮어낸 룩셈부르크 출신의 피아니스트입니다. 플루티스트 조성현도 빼놓을 수 없는 라이징 스타죠.”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김가영 기자 | 사진 제공 크레디아, 이담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