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5.20 23:52
['LOVE'의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의 집에 가다]
-외딴 섬에 사는 은둔의 예술가
60年代 예술계 날 '싸구려' 취급, 그 상처로 뉴욕 떠나 홀로 생활… 기자 방문하자 "한국인 처음 봐"
-내가 상업적 작가?
전세계에 'LOVE' 퍼졌지만 저작권 등록 못해 번 돈 없어… 1998년 돼서야 정식 등록
-35년 만에 재평가받는 'LOVE'
내게 'LOVE'는 어머니 사랑… 9월 뉴욕에서 회고전 열려 "오랫동안 기다렸던 일이다"

'L·O·V·E' 단 네 글자로 전 세계를 매혹한 남자, 그러나 그 성공 때문에 '은둔자'로 살고 있는 남자. 'LOVE'의 작가 로버트 인디애나(Indiana·85)를 최근 미국 메인주(州) 바이널헤이븐(Vinalhaven)섬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LOVE'로 명성을 얻다
뉴욕에서 보스턴을 거쳐 바이널헤이븐 섬까지 비행기, 버스, 자동차, 배로 19시간…. 로버트 인디애나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조기가 그려진 4층짜리 건물. 문설주에 놓인 돌멩이를 집어 대문을 두드리자 수척한 노인이 나타났다. "한국 사람을 만난 건 당신이 처음이야. 이건 정말 대단한 경험이군. 게다가 참 기이하군. 북한이 난리를 치고 있는 이때에 나를 만나러 오다니."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이 외딴 섬에서 그는 은둔 중이다.
1978년 그는 뉴욕에 넌더리가 났다며 바이널헤이븐에 정착했다. 그러나 뉴욕·도쿄·예루살렘·리스본 등 전 세계에 'LOVE' 조각이 '랜드마크'처럼 깔렸고, 세상은 그를 광적으로 소비했다.
―세계 곳곳의 'LOVE' 조각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이 단어로 작업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
"1964년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내게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 달라고 의뢰했다. O자를 얌전하게 세웠더니 어쩐지 재미가 없어서 살짝 기울여 다이나믹하게 만들었다. 그 카드가 엄청난 인기를 끌며 'LOVE'도 유명해졌다."
◇'LOVE'로 불행해지다
―우표, 머그컵, 티셔츠…. 당신의 'LOVE'는 수많은 이미지로 소비됐다. '상업적'이라는 악평도 얻었다.
"아니. 나는 결코 상업 작가가 아니었다. 'LOVE'로는 돈을 벌 수 없었다. 저작권 등록을 못 한 게 문제였다. 그 실수는 내 인생과 내 작업에 굉장히 나쁜 영향을 줬다."
1960년대 그는 뉴욕의 '스타'였다. 33세 때인 1961년 MoMA 그룹전에서 선보인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도 MoMA 상설 전시실에 걸려 있다. 1966년 'LOVE'를 주제로 연 세 번째 개인전은 TV로 방영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정점에 다다른 순간 추락이 찾아왔다.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바바라 해스켈은 "저작권을 얻지 못한 탓에 'LOVE' 이미지가 너무 흔해졌고, '상투적 작품(cliche)' 취급을 받았다. 평론가와 뉴욕 미술계도 이때부터 등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왜 뉴욕을 떠나 섬으로 들어왔나.
"나는 뉴욕에서 배척(blackball)당했다. 평화와 행복을 찾아 바이널헤이븐으로 도망쳤다. 이젠 다 잊었다. 내 마음에서 다 떨쳐버렸다."
◇그의 'LOVE'는 현재진행형
그는 한자어(愛) 등으로도 작업하고 싶지만 고객들은 언제나 'LOVE'만을 원한다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에게 'LOVE는 매우 사랑스럽고, 가끔은 저주스러운 '낙인'인 셈이다. 그의 러브 스토리가 궁금했지만 그는 "그런 거 없다"며 단호히 답하고선 화제를 돌렸다. '남자' 친구와의 사연을 말하기는 싫었던 것 같다.
◇'LOVE'로 명성을 얻다
뉴욕에서 보스턴을 거쳐 바이널헤이븐 섬까지 비행기, 버스, 자동차, 배로 19시간…. 로버트 인디애나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성조기가 그려진 4층짜리 건물. 문설주에 놓인 돌멩이를 집어 대문을 두드리자 수척한 노인이 나타났다. "한국 사람을 만난 건 당신이 처음이야. 이건 정말 대단한 경험이군. 게다가 참 기이하군. 북한이 난리를 치고 있는 이때에 나를 만나러 오다니."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이 외딴 섬에서 그는 은둔 중이다.
1978년 그는 뉴욕에 넌더리가 났다며 바이널헤이븐에 정착했다. 그러나 뉴욕·도쿄·예루살렘·리스본 등 전 세계에 'LOVE' 조각이 '랜드마크'처럼 깔렸고, 세상은 그를 광적으로 소비했다.
―세계 곳곳의 'LOVE' 조각을 배경으로 사람들은 사진을 찍는다. 이 단어로 작업할 생각은 어떻게 했나.
"1964년 MoMA(뉴욕현대미술관)에서 내게 크리스마스카드를 그려 달라고 의뢰했다. O자를 얌전하게 세웠더니 어쩐지 재미가 없어서 살짝 기울여 다이나믹하게 만들었다. 그 카드가 엄청난 인기를 끌며 'LOVE'도 유명해졌다."
◇'LOVE'로 불행해지다
―우표, 머그컵, 티셔츠…. 당신의 'LOVE'는 수많은 이미지로 소비됐다. '상업적'이라는 악평도 얻었다.
"아니. 나는 결코 상업 작가가 아니었다. 'LOVE'로는 돈을 벌 수 없었다. 저작권 등록을 못 한 게 문제였다. 그 실수는 내 인생과 내 작업에 굉장히 나쁜 영향을 줬다."
1960년대 그는 뉴욕의 '스타'였다. 33세 때인 1961년 MoMA 그룹전에서 선보인 '아메리칸 드림'은 지금도 MoMA 상설 전시실에 걸려 있다. 1966년 'LOVE'를 주제로 연 세 번째 개인전은 TV로 방영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정점에 다다른 순간 추락이 찾아왔다.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 바바라 해스켈은 "저작권을 얻지 못한 탓에 'LOVE' 이미지가 너무 흔해졌고, '상투적 작품(cliche)' 취급을 받았다. 평론가와 뉴욕 미술계도 이때부터 등을 돌렸다"고 설명했다.
―왜 뉴욕을 떠나 섬으로 들어왔나.
"나는 뉴욕에서 배척(blackball)당했다. 평화와 행복을 찾아 바이널헤이븐으로 도망쳤다. 이젠 다 잊었다. 내 마음에서 다 떨쳐버렸다."
◇그의 'LOVE'는 현재진행형
그는 한자어(愛) 등으로도 작업하고 싶지만 고객들은 언제나 'LOVE'만을 원한다며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에게 'LOVE는 매우 사랑스럽고, 가끔은 저주스러운 '낙인'인 셈이다. 그의 러브 스토리가 궁금했지만 그는 "그런 거 없다"며 단호히 답하고선 화제를 돌렸다. '남자' 친구와의 사연을 말하기는 싫었던 것 같다.

한때 그의 'LOVE'는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도안(圖案)일 뿐"이라며 혹평받았다. 현재 'LOVE'는 "심플한 디자인에 다양한 해석을 담은 작품"이라는 평을 얻는다.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LOVE' 작품은 411만4500달러(약 45억8000만원).
―당신에게 'LOVE'란.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는 차가웠지만 어머니는 '카르멘'이란 집시 이름에 걸맞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갓난아이 때 입양됐다. 친부모 얼굴은 모른다. 키워준 '어머니'는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다른 대표작 'EAT'는 어머니가 임종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는 아직도 사랑에 주린 어린아이 같았다. 집안 곳곳에 동물 인형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몸통을 일일이 눌러 울음소리를 들려줬다. 캥거루 인형을 가리키며 "그의 이름은 호세. 캥거루는 수컷도 새끼를 돌봐"라고도 했다. 아버지가 새 여자에게로 떠난 후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가정식 요릿집을 운영했다.
―최근 당신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9월 26일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회고전도 그 일환이다.
"정말 흥분된다. 뉴욕에서 열리는 내 첫 미술관 회고전 아닌가. 나는 오랫동안 이를 기다려 왔다. 내 '아메리칸 드림', '숫자(number)' 연작, 그리고 'LOVE'. 모든 걸 다 보여줄 거다."
―예술이란 당신에게 뭔가.
"모든 것. 내 삶의 목표."
다음 날 아침 뉴욕 6번가. 한 무리의 관광객이 'LOVE'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상파울루에서 왔다는 마우리치오 귀마라에스(38)씨는 "'LOVE'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왔다. 사랑하는 법에 서툰 현대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LOVE'는 여전히 뉴욕의 상징이었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1928년 미국 인디애나주 뉴캐슬 출신. 본명은 로버트 클라크(Clark). 1954년 고향 이름을 따 ‘인디애나’로 개명했다. 히피 성향의 양부모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전전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졸업 후 1954년 뉴욕에서 활동을 시작, 팝 아티스트로 큰 명성을 얻었다.
―당신에게 'LOVE'란.
"어머니의 사랑. 아버지는 차가웠지만 어머니는 '카르멘'이란 집시 이름에 걸맞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는 갓난아이 때 입양됐다. 친부모 얼굴은 모른다. 키워준 '어머니'는 그의 예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 다른 대표작 'EAT'는 어머니가 임종 직전 남긴 마지막 말이다. 그는 아직도 사랑에 주린 어린아이 같았다. 집안 곳곳에 동물 인형 수십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몸통을 일일이 눌러 울음소리를 들려줬다. 캥거루 인형을 가리키며 "그의 이름은 호세. 캥거루는 수컷도 새끼를 돌봐"라고도 했다. 아버지가 새 여자에게로 떠난 후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가정식 요릿집을 운영했다.
―최근 당신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9월 26일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회고전도 그 일환이다.
"정말 흥분된다. 뉴욕에서 열리는 내 첫 미술관 회고전 아닌가. 나는 오랫동안 이를 기다려 왔다. 내 '아메리칸 드림', '숫자(number)' 연작, 그리고 'LOVE'. 모든 걸 다 보여줄 거다."
―예술이란 당신에게 뭔가.
"모든 것. 내 삶의 목표."
다음 날 아침 뉴욕 6번가. 한 무리의 관광객이 'LOVE'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상파울루에서 왔다는 마우리치오 귀마라에스(38)씨는 "'LOVE'를 보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왔다. 사랑하는 법에 서툰 현대인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LOVE'는 여전히 뉴욕의 상징이었다.
☞로버트 인디애나는
1928년 미국 인디애나주 뉴캐슬 출신. 본명은 로버트 클라크(Clark). 1954년 고향 이름을 따 ‘인디애나’로 개명했다. 히피 성향의 양부모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동차를 타고 미국 전역을 전전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졸업 후 1954년 뉴욕에서 활동을 시작, 팝 아티스트로 큰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