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창극에 그리스 惡女가 주인공?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05.19 23:30

국립창극단 신작 '메디아' 서재형·한아름 부부의 합작… 서양 악녀 한국적 恨으로 풀어

너희 중에 사랑해보지 않은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의 신작 창극 '메디아'의 부르짖음이다. 무릇 창극이라 하면 심청이나 춘향이가 나와서 익숙한 옛 가락을 구성지게 들려줘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메디아라니?

2500년 전 그리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에 의해 탄생한 후, 외젠 들라크루아의 붓끝에서 '격노한 메디아'(1838)로 묘사됐고, 마리아 칼라스 주역의 오페라(1953)에서 희대의 '악녀'로 되살아난 메디아는 어디까지나 서양적 마녀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연출가 서재형·극작가 한아름 부부는 이 메디아를 비통하고 절통한 한(恨)을 품은 창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두 사람은 이미 연극 '죽도록 달린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에서 부부 합작의 힘을 증명해왔다.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죽여 남편에게‘복수’한 악녀 메디아.
자신이 낳은 아이마저 죽여 남편에게‘복수’한 악녀 메디아. 국립창극단의‘메디아’는무엇이 그녀를 악녀로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국립창극단 제공
지난 13일 국립극장 연습실에서 지켜본 '메디아'는 창극 발성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와 질펀한 비명이 흥건했다. 듣고만 있어도 가슴을 움켜쥐고 싶어지는 통절한 소리의 힘이다.

전설의 보물 황금 양피를 찾아온 남자 이아손에게 한눈에 반한 메디아는 그를 위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황금 양피를 갖다 바친다. 이아손을 박해하는 시숙부도 죽인다. 동생의 살해도 방조한다. 그러나 이아손은 더 큰 권력을 위해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려 한다. 다 줬더니 이제 와서! 메디아는 "비탄으로 목욕하고, 불행으로 화장하니 억울하다!"며 절규한다. 결국 이아손과 결혼하려는 공주를 불태워 죽이고, 공주의 아비도 살해한다. 거기서 그치면 역사에 남을 악녀가 아니다. 이아손과 함께 낳은 아이 둘을 제 손으로 죽여 그의 면전에 보란 듯이 던져준다. 극작가 한아름은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갔는지를 묻는다. 남성 위주의 질서가 만든 희생자는 아녔느냐고.

창극은 일종의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기존 판소리에서 소리를 뽑아 변형하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100분간 이어지는 곡을 작곡가 황호준씨가 전부 새로 만들었다. 무대에는 요즘 연극계에서 가장 바쁜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만든 '칼날 샹들리에'가 거꾸로 꽂힌다. 내리꽂히면 수백의 목숨을 단번에 도륙 낼 듯한 살기를 품고 천장에 달렸다.

'메디아'는 지난해 김성녀 감독 취임 이후 계속돼온 창극 형식 파괴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해 11월 연출가 한태숙씨의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이라는 도발적인 시도로 매진을 기록한 창극단의 도전은 다른 누구보다 관객을 위해 반가운 실험. 뮤지컬 공연장은 대부분 20·30대 여성 관객이 채운다. 그러나 극과 노래의 결합이라는 원초적 엔터테인먼트에 대한 갈증은 40대 이상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그 갈증을 채울 수 있는 새로운 무대를 창극단이 만들어간다. '메디아' 실험의 첫 무대는 22일 시작된다.

▷창극 '메디아' 2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