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영화 한 편 본 것 같은데… 미술이라네요

  • 이태훈 기자
  • 곽아람 기자

입력 : 2013.04.08 23:47

[영화와 똑같이 찍는 미술작품]

-미술, 영화를 모방하다
미디어 기술 발달로 촬영 쉽고 물감보다 강렬한 효과 얻기 때문… 최근 작품들 스토리 더 강화
-판매는 어떻게?
영상 구매 주 고객은 미술관… 제작과정 스틸컷 판매하기도

#1. 지난해 카셀 도큐멘타에 한국 대표로 참여한 문경원(44)·전준호(44)팀은 이정재·임수정 주연의 15분짜리 단편 영화 '세상의 저편'을 선보였다. 대사는 거의 없고, 줄거리는 있는 영화다. 이들은 "비주얼에만 초점을 맞춘 미술계의 기존 영상작업에 회의가 들었다. 영상미와 주제 의식이 긴장감을 잃지 않는 정교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했다.

#2.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미장센-연출된 장면들' 전시장. 커다란 스크린, 관람객 전용 의자를 갖춘 작은 '영화관'이 두 곳 마련됐다. 이곳에선 영상물 '알카자르의 89초'(10분)와 '다섯 번째 밤'(10분 37초)이 각각 상영된다. 팝콘과 콜라 반입이 안 된다는 점을 빼면, 예술영화 전용관과 큰 차이가 없다.

문경원·전준호의 지난해 카셀 도큐멘타 출품작‘세상의 저편’한 장면. 임수정·이정재 주연의 15분짜리 이 영화는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미래 사회에서 예술의 역할을 묻는 내용으로 대사는 거의 없다. 사진은 영화에서 세계 최후의 예술가 역할을 맡은 이정재. /갤러리현대 제공
영화를 먹어치우는 미술

'활동 사진'이라 불렸던 영화는 원래 미술 모방으로 시작했다. 뤼미에르 형제의 최초의 단편 영상 '기차의 도착'(1896)은 동명의 모네 그림을 구도와 앵글까지 옮겨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거꾸로 미술이 영화를 모방하고 있다. '미술=그림'이라고 믿는 고전적 애호가들과는 별개로 꽤 많은 젊은 작가가 현재 '영화'를 미술의 범주에 넣고 있다. 11일 서울 코리아나미술관에서 개막하는 '퍼포밍 필름'전에서도 영국 영화감독 데이비드 힌튼의 '스노'(2003) 등 14점의 비디오 영상과 필름이 선보인다.

영화적 메커니즘이 미술가 지배

조짐은 앤디 워홀이 주도한 팝아트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최근 작품은 '완벽한 영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영화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하는 노재운(42)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어릴 때부터 영화적 메커니즘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고 했다. 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고급 물감보다 좋은 스크린과 프로젝터가 훨씬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작가들이 이제 영화적 기법을 통해 대중의 시선을 끌고 있다"고 했다. 영화감독 출신의 작가들이 미술전시장에 작품을 전시하는 것도 이제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김지훈 싱가포르 난양기술대 영화매체연구조교수는 "미술계의 영상작업을 놓고 '영화'냐 '미술'이냐 구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영상물의 전시장 '침입'은 새로운 관객에 대한 미술관의 욕망, 새로운 무대에 대한 영화계의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 지난해 오일탱크를 새 단장해 라이브 아트 전용 전시장으로 개관한 영국 테이트모던은 개관전으로 김성환(38)의 단편 영화 4점을 선보였다. "대중은 보다 활동적이고 시각적인 예술에 관심이 있다. 미술관은 관객의 변화에 발맞춰야 한다"는 게 크리스 더컨 관장이 밝힌 이유. 미술이 영화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관객몰이를 위해 영화에 '기대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술작품으로서의 영상과 영화의 차이를 정확히 짚을 수 없다는 것도 '미술'이 풀어야 할 숙제다. 현재로선 '전시장에서 틀면 미술, 영화관에서 틀면 영화'라는 관람 환경에 따른 '구분'만 가능하다. 스스로를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이 '무규칙 변종 장르'는 허깨비인가, 장르 통합의 씨앗인가 미술계에서도 아직은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다.

영상 작품, 어떻게 파나

그렇다면 이런 작업에도 '컬렉터'가 있을까. 영상작업의 주 고객은 대개 미술관이지만 김수자(56), 빌 비올라(62) 같은 '스타 작가'들은 개인 컬렉터에게도 인기가 있다.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회화 작품을 꽤 구비한 컬렉터들이 영상작업을 구입한다. 라이트박스로 제작해 벽에 그림처럼 걸어놓고 즐기는 식"이라고 말했다. 사진작업을 겸하는 영상 작가들은 제작과정을 찍은 사진인 영상 스틸컷, 제작 아이디어가 담긴 드로잉을 판매하기도 한다. 김수자의 사진은 점당 3만~4만달러선에 팔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