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이해랑 연극상] 이 연출가의 무대 "아파도 그대로 보여 준다"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03.29 03:04 | 수정 : 2013.03.29 05:38

['이해랑 연극상' 연출가 이성열]

셰익스피어가 타란티노라면 나는 실재성을 천착한 체호프
'지금을 산다'를 잘 전달해야 사회를 되비치는 예술이 된다

작품마다 달라지는 연출 색깔, 텍스트에 맞추는 게 내 스타일

술을 한 잔 걸친 남자가 밤거리에 들어섰다. 취한 눈에 골목 한가운데 커다란 물체가 들어왔다. 얼핏 언덕처럼 보였으나 실은 포크레인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웅크린 그 모습은 일만 하다 잠든 우리 시대의 황소였다. 그는 거기서 아버지를 보았고, 형을 느꼈으며, 시대를 감지했다.

포크레인의 묵묵한 '실재감'에 울었던 남자는 제23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이성열(51)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감이 중요하며, 얼마나 진짜인가를 고민한다"고 했다. 1991년 창작극 '한만선'(작 오태석)으로 데뷔한 이성열은 오태석, 이윤택, 한태숙 등 60·70대 연출가 세대를 잇는 50대 연출가의 선두에 서 있다. '대학로 순수연극의 리더'로 꼽힌다.

연세대 사학과에 다니며 연희극회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무대미술가 박동우(제16회 이해랑연극상 수상)가 극회 동기. 1989년 박동우의 소개로 들어간 곳이 극단 산울림이다.

첫해 근무일은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30분까지 일했다. 산울림에서 미치도록 연극만 했던 5년은 이후 극단 '백수광부'를 이끌어가는 기초 체력이 됐다. 1996년 창단한 백수광부는 이름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백수건달이 모인 단체냐고들 했다. "연극이라는 술에 취해 흥에 겨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가듯 소리없이 사라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었다"고 했다.

연출가 이성열에게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은‘실재감’이다. 있는 그대로가 중요하다는 정신이 그의 작품을 관통한다. /이태경 기자
그는 오태석과 임영웅을 두 아버지요, 스승으로 꼽는다. "임영웅 선생님께는 정교하고 논리적인 텍스트 분석을, 오태석 선생님께는 텍스트를 벗어나 자기를 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의 연극은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제단이다. 극적이고 강렬한 셰익스피어극은 그와 거리가 멀다. "세익스피어의 피범벅 연극은 요즘으로 치면 홍콩 누아르 영화다. 셰익스피어는 그 시대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었겠지. 가장 인기 있고 흥행 잘하고. 하지만 저는 피 냄새 말고 인간의 향기가 느껴지는 작품이 좋다." 심심하지만 가장 실재성을 형상화했다는 안톤 체호프에 그래서 끌린다. "체호프의 작품에서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 살고 있다는 리얼리티가 느껴진다. 세잔의 정물화가 유독 아름답거나 멋있는 풍경도 아닌데 쾌감을 주는 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느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시대 이 공간에서 존재하는 느낌을 잘 표현하면 사회를 되비치는 예술이 된다고 믿는다."

(맨 위)산울림 시절 연출했던 '여성반란'(1993·작 김광림). (가운데)'그린벤치'(2005·작 유미리). 서울연극제 5개 부문 수상작. (맨 아래)지난해 잇단 찬사를 받았던 아리엘 도르프만의 '과부들'
그의 연출은 색깔이나 스타일이 뚜렷하지 않다. 그의 표현을 따르면 '잡탕'이다. "어떤 텍스트든 자기식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텍스트에 맞게 연출하는 것이 내 방식"이라고 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예리하고 섬뜩한 '그린 벤치'(2005), B급 포스트모던 정서의 '야메의사'(2006), 서정적이고 설화적인 '봄날'(2009)이다.

이성열은 지난해 칠레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과부들'로 연극계를 흔들었다. 남자들은 모두 납치되고 여인들만 남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3시간30분짜리 대작이다. 시적인 대사, 현대극이면서도 희랍극 같은 장중함이 대극장을 채웠다. 민간 극단의 존재 이유와 저력을 보여줬다는 찬사가 잇따랐다. "모든 감동은 세상을 긍정하는 속에서 나온다. 긍정성을 감상적 휴머니즘으로 풀면 신파다. 괴롭고 아픈 현실을 보여줘야 한다. 있는 그대로."

지인들이 말하는 이성열

채윤일·연출가

"때로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싶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주목해 귀한 성과를 이뤄냈다."

(왼쪽부터)채윤일·연출가, 정만식·배우, 박근형·연출가, 최치언·극작가.
정만식·배우

"내가 알고 있는 영화·연극 연출가들 중 단연 으뜸의 귀를 가진 분. 극의 상황과 대사, 음악에 대한 분석이 뛰어나 듣고만 있어도 교향곡처럼 느껴지는 연극을 만든다."

박근형·연출가

"그의 극단 '백수광부'는 부조리하고 암울한 현실의 강을, 연극이라는 술병 하나 들고 건너려 애쓰는 그의 거울이다. 결국은 물속에 빠져 죽는다 할지라도,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우리에게 함께 하자고 손짓한다."

최치언·극작가

"언제나 군더더기 없는 신도합일(身刀合一)의 연출로 사람의 영혼까지 훔치는 섭혼술의 고수. 감정의 흔들림 없이 상대를 일보 뒤로 밀어내며 자신의 영역을 태산처럼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