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는 게 값, K옥션 자선경매에 가다

입력 : 2013.03.21 18:04

싸이 선글라스 160만원, 김연아 스케이트&가방 3천4백만원

미술품 경매는 일반인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주로 미술품 컬렉터나 화랑의 대표 들이 모이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턱을 낮추려는 의미에서 K옥션이 ‘사랑 나눔 경매’를 열었다. 미래의 아티스트를 후원한다는 행사의 취지에 공감해 김연아, 싸이, 장동건·고소영 부부, 빅뱅도 애장품을 기증했다.

“천, 천백, 천2백, 천3백…”
눈 깜짝할 사이에 가격이 껑충껑충 뛴다. 2백만원에서 시작한 작가 손상기의 작품 <목마와 여인>이 무려 1천3백만원에 낙찰됐다. 경매사가 낙찰 확정을 공표하기 전까지 누구의 손에 작품이 들아갈지 예상할 수도 없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던 이가 막판에 포기하기도 하고, 경매가 진행될 동안 잠잠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큰 금액을 호가해 단번에 낙찰받기도 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흥미진진한 풍경. 지난 1월 30일 오후 5시 신사동에 위치한 K옥션에서 ‘사랑 나눔 경매’가 열렸다. 경매시작 두 시간 전부터, 장내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양옆으로 전시된 경매품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이들의 시선을 끈 건 바로 유명인들의 기증품. 국민요정 김연아는 스케이트와 트렁크를, 월드스타 싸이는 선글라스와 공연티켓을, 패셔니스타 장동건·고소영 부부와 빅뱅은 각각 패션 소품을 기증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인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손팻말(패들), 거침없이 올라가는 금액. 처음 보면 어안이 벙벙해질 풍경이지만, 이날만큼은 훈훈한 풍경이다. 낙찰된 금액의 50%가 기부되는데, 모두 미래의 아티스트를 후원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경매는 현장, 전화, 서면을 통해 동시에 진행된다. 같은 가격을 제시한 경우 서면, 현장, 전화순으로 우선권을 갖는다. 102개의 품목으로 시작한 ‘사랑 나눔 경매’는 100% 낙찰률을 보이며 마감됐다. 총 금액은 약 3억4천만원 정도였다.

1 7천8백만원에 낙찰된 천경자의 그림 <여인>. 2 백60만원에 낙찰된 싸이의 선글라스와 공연티켓. 3 백30만원에 낙찰된 장동건·고소영 부부의 가방. 4 빅뱅, 2NE1이 기증한 의상.
싸이, 김연아, 장동건, 고소영, 빅뱅, 2NE1의 소장품들이 한자리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국민요정 김연아의 후광이 빛났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루이뷔통 트렁크, 오직 김연아를 위해 제작된 가방은 경매시작부터 화제가 됐다. 루이뷔통이 디자인 프로젝트를 제안해 김연아와 긴밀한 협업을 통해 제작한 트렁크다. 김연아가 직접 디자인 과정에 참여했고, 파리 아니에르 공방의 장인이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경매에 나온 트렁크는 김연아에 전달된 것과 동일한 디자인으로 자선경매를 위해 추가 제작된 것이다. 트렁크는 스케이트를 담기 위해 제작된 터라, 수납공간이 독특하다. 직접 고른 아이보리 가죽 소재와 하늘색 서랍이 달렸다. 여기에 김연아 선수의 사인이 담긴 스케이트가 담겼다. 경매는 3천만원에서 시작돼, 3천4백만원으로 최종 낙찰됐다.

싸이의 선글라스와 서울 공연티켓도 경쟁이 치열했다. 싸이의 인기가 치솟는 만큼, 무엇보다 소장가치가 있는 물품. 그는 공연 때마다 거의 대부분 선글라스를 끼기 때문에 싸이의 트레이드마크로써 더 큰 관심을 모았다. 10만원에서 시작해 탁구를 치듯 핑퐁이 계속되던 경매는 결국 1백60만원에 마감됐다. 빅뱅 두 멤버의 의상 경매도 흥미로웠다. 전화경매, 문서경매를 통해서도 전방위 입찰이 진행됐다. 약속이나 한 듯 사이좋게 1백90만원으로 낙찰돼 현장에서 웃음을 자아냈다. 장동건·고소영 부부는 패셔니스타답게 소장하고 있던 가방을 출품했다. 현장의 인기가 좋았던 두 사람의 가방은 합계 1백30만원으로 낙찰됐다.

K옥션의 이상규 대표는 “매번 미술작품 위주로 진행했는데, 올해에는 일반인들의 관심과 성원을 모으기 위해 연예인들의 작품과 옷 등을 함께 준비했다”고 밝혔다. 미술경매시장이 불황임에도 100% 낙찰을 기록한 데는 이런 이벤트가 유효했다는 평가다. 특히 미술에 문외한인 이들에게도 미술경매의 문턱을 낮추는 효과를 봤다.

천경자의 작품, 지난 10년 동안 가장 많이 가격 올라

미술계 인사나 원로화가 들에게 기증받은 작품은 시중가의 30% 선에서 경매를 시작했다. 화가 이왈종, 설치미술가 박선기 등 현재 두각을 나타내는 아티스트들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관심을 모은 건 최고가를 기록한 천경자의 작품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화가 천경자. 줄담배를 즐겨피우는 카리스마 있는 화가로 유명한 그는 꽃, 동물 등의 소재를 비롯 독특한 색채나 구성을 선보여 ‘천경자 화풍’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9살이라는 고령에도 불구, 강렬하고 이국적인 인물 표현으로 대중적 인기가 높은 작가다. 이번 작품은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이 기증했다. 1990년대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 선언까지 했던 천 작가는 현재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다.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라 작업은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의 한 보도에서 ‘지난 10년간 가장 많이 가격이 오른 작품’으로 천경자의 작품이 꼽힌 바 있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교수가 지난 1월 28일 발표한 ‘2012년 미술시장 결산’에 따르면 천경자의 작품은 가격상승률이 272%에 달했다. 네 배 가까이 작품 값이 오른 것이다. 10년의 전 호당 가격이 천만원 수준이었다면 현재 4천만원 수준으로 올랐다는 얘기. 특히 여인 얼굴에 꽃과 나비가 함께 그려져 있는<‘미인도> 시리즈는 가장 인기가 높은데, 3호 기준이 서울옥션 경매에서 2억6천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작가의 친필사인이 들어가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컬렉터이자 미술품 감정위원인 엄중구 대표(샘터화랑)는 “천경자 작품은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고 대중적으로 친숙해 컬렉터 층이 두터운 편”이라며 “작가 인지도와 유명도가 작품 값에 비례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경매에서 역시, 그의 작품 <여인>이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천경자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미래의 아티스트를 키우다

K옥션은 이번에 모은 기금으로 ‘주니어 아티스트’를 키우는 데 쓰겠다고 발표했다. 예체능 교육에 천문학적인 액수가 드는 요즘, 재능이 있어도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저소득층 학생들이 그 대상자다. 한국메세나협회와 함께 2010년부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나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에게 미술교육을 지원해오던 활동의 연장이기도 하다.프로그램의 멘토로 참여한 하태임 작가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신감을 되찾는 일’이라며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이 변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둡고 우울해 보이던 아이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해 하고 싶은 미술을 하면서 변해가는 걸 봐요. 이번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집이 어려워 예고에 진학하고 싶어도 실업계나 인문계를 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침체된 미술시장에는 활기를, 꿈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는 자신감을. 미술품 경매가 부유층의 취향이 아니라 기부문화의 꽃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현장이었다.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유슬기 기자 | 사진 유진행 | 자료 K옥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