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에 억눌렸던 아저씨의 삶, 춤으로 풀다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3.02.17 23:42

[공연계에 부는 아저씨 춤바람]
딸과 무대서는 무용수 정관영, 깨지고 무너지는 아빠 표현
"여성 관객의 공감 얻고 싶어"

춤판에 '아저씨'들이 몰려온다. 장르도 넘나든다. 한국무용에 현대무용까지 가세했다. 남자도 살림하고 육아휴직 하는 시대, 성(性) 역할의 고정관념에 짓눌려온 그들이 억눌렸던 남성을 원초적 몸짓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 동시대적이며 일상적인 고민을 담았다는 점에서 고전의 재해석 위주 한국무용, 철학적·사색적 표현에 치우친 현대무용의 틀을 깨는 반가운 시도이기도 하다. 첫 주자는 22일 올라가는 국립무용단 무용수 정관영의 '젠틀맨'. 내달 1일부터는 아저씨들이 단체로 공연하는 안은미무용단의 '무책임한 땐스'가 이어진다.

◇때로는 '젠틀맨'이 아니고 싶다

올해 국립무용단 입단 15년차인 무용수 정관영(42)은 딸 재인(10)양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부녀(父女) 공연은 국립무용단 창단 이후 처음이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만난 정씨는 "아들로 태어나 소년으로 자라고 아저씨로 나이 들어가는 남자의 외로움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대한민국 중년 남성의 일상과 고민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젠틀맨’의 정관영. /국립극장 제공

작품 제목 '젠틀맨'은 반어적이다. 무대에는 젠틀맨이 되지 못해 몸부림치는 남자가 나온다. 1장에 등장한 아저씨의 목표는 '좋은 직장인'. 2장은 '좋은 남편, 3장은 '좋은 아빠'의 고통이 보여진다. 특히 1장에서는 무한 경쟁에 시달리는 직장 남성의 모습을 강하게 드러낼 예정. 국립무용단에서 '예술하는' 그가 직장인의 고통을 알까? "무용단도 똑같은 직장입니다. 경쟁도 심하고 오해도 생깁니다. 무엇보다, 조직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대한민국 남자라는 점이 같죠."

그는 "여성 관객이 와서 보고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2장에 나오는 전화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다. '전화 장면'에서는 무대에 선 그의 휴대폰으로 아내의 번호가 뜬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남자는 때로 혼자이고 싶다"는 것이 그의 설명.

정관영의 딸 재인양은 3장에서 동요 '아빠와 크레파스'를 피아노로 친다. 딸 앞에서는 늘 대단해 보이려고 애썼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상사에게 깨지고 무너지는 아빠를 그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그는 소고를 들고 무대에 오른다. "소고는 제게 심장과 같은 존재입니다. 남자의 막힌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와 춤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안무는 국립무용단 수석무용수 이정윤씨, 음악감독은 평론가 윤중강씨가 맡았다.


 

‘아저씨들의 무책임한 땐스’에 출연하는‘진짜 아저씨’들. /두산아트센터 제공

◇무대에서라도 '무책임하게' 분출

40~60대 아저씨 25명이 한꺼번에 추는 막춤이 '아저씨들을 위한 무책임한 땐스'다. 무질서한 이들의 춤에 안은미씨가 큰 그림의 안무를 그려 질서와 감각을 불어넣는다. 오디션과 길거리 캐스팅으로 뽑은 아저씨들은 대부분 회사원이다. 뮤지컬 '유럽 블로그'에 출연 중인 배우 성두섭씨의 아버지도 있다. 근엄한 한국 남성의 책임과 의무를 잠시 내려놓은 막춤은 빠른 박자의 뽕짝 리듬이 기본이다. 연습도 비교적 자유롭다. 용산구 한남동 연습실에서 시간 나는 대로 몸을 풀고 있다. 안은미씨는 "보는 아저씨들의 기운도 같이 분출되는 무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용평론가 장인주씨는 "아마추어의 적극적인 참여는 문화민주주의가 확장된 사례"라며 "무용 시장 확대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젠틀맨' 22~24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02)2280-4114~6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 3월1~3일,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02)708-5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