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밤 '기적의 지젤'

  • 평창=최인준 기자

입력 : 2013.02.01 03:02 | 수정 : 2013.02.01 14:40

다운증후군 발레리나 백지윤, 2분간 몸짓에 700명 기립박수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무대]
눈동자 흔들려 다섯 차례 수술, 질식사 위험에 혀 절개 수술
수술대 오른 것만 10여 차례… 근력 약하고 균형 감각 떨어져, 온몸 멍들어도 발레 포기 안해
최태지 국립발레단장 만나 대학 진학 등 꿈 키울 기회 얻어 "볼쇼이발레단 가고 싶어요"

무대에 선 주인공의 키는 142㎝에 불과했다. 220㎜의 작은 발에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려다 몇 번 균형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백지윤(21·디지털문화예술대학교)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낭만 발레의 대표작 '지젤'의 1막 부분을 연기했다. 청순한 시골 처녀 지젤의 모습을 감성적으로 표현했다. 백지윤이 2분가량의 솔로 파트를 끝내자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콘서트홀을 찾은 관객 700여명은 "브라보"를 외치며 기립박수를 쳤다.

백지윤은 30일 저녁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을 찾은 선수단과 일반 관람객을 위한 특별 문화 공연을 마치자 곧바로 무대 뒤로 달려갔다.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이명희(48)씨 앞에서 까치발을 들어 눈을 맞추며 "엄마, 오늘 밤은… 제가 주인공이죠?"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래, 우리 딸 최고야!"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백지윤은 선천성 장애(다운증후군) 때문에 근력이 약하고 균형 감각이 부족하다. 발레를 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벌써 발레 경력이 10년이나 된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동네 무용학원을 지나다 아이들이 발레를 하는 모습에 반해 배우기 시작했다.

2010년 7월 한국문화예술교육총연합회 콩쿠르에선 비장애인과 경연을 벌여 고등부 동상을 타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백지윤은 이듬해 진학한 대학교에서도 무용을 전공하며 발레리나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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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윤이 30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콘서트홀에서 ‘지젤’의 1막 부분을 연기하고 있다. 백지윤은 선천적 장애(다운증후군) 때문에 근력이 약하고 균형 감각이 부족하지만 발레에 대한 열정으로 발레리나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이준헌 기자
백지윤은 이날 공연이 열리기 전 대기실에서 국립발레단 무용수 언니·오빠들과 웃음꽃을 피웠다. 공연 뒤에는 단원들에게 "저 오늘 '짱(최고)'이지 않았어요? 사인해 드릴까요?"라는 농담까지 했다. 어머니 이씨는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이가 밝아졌다"며 "발레가 지윤이에게 힐링(치유)이 됐다"고 말했다.

백지윤은 초등학교 때만 해도 다운증후군이 있는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안구 진탕(눈동자가 흔들리는 증상) 탓에 시력이 나빠 눈 수술을 다섯 차례나 받았다. 질식사 위험을 줄이기 위한 혀 절개 수술도 했다. 수술대에 오른 것만 10여 차례였다.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많이 당했다. 가방엔 언제나 같은 반 아이들이 던진 돌과 흙이 들어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곤 했다.

발레 덕분에 성격은 조금씩 밝아졌지만 실력은 잘 늘지 않았다. 어머니 이씨는 몰래 무용학원을 찾아갔다가 딸이 연습실 구석에서 멀뚱멀뚱 남의 동작만 쳐다보는 모습에 애를 태웠다고 했다. "장애가 있는 지윤이가 동작을 따라 하는 게 쉽지 않았지요. 발끝으로 서는 동작은 물론이고 한 바퀴 턴 하는 것도 무리였어요. 자꾸 넘어져서 팔, 다리엔 멍투성이였죠. 그런데도 힘들다는 얘기는 하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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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헌 기자
정체기에 빠져 있던 백지윤은 고2 때 은인을 만났다. 한 장애인 무용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나온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이 백지윤을 눈여겨본 것이다. 최 단장은 "솜씨는 서툴어도 발레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며 그 자리에서 백지윤의 국립발레단 아카데미 오디션을 제의했다. 오디션만 통과하면 모든 레슨비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카데미에 합격한 이후 백지윤은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연습하며 기초부터 다시 다졌다. 이후 10여 차례 크고 작은 무대에 서며 지적장애인 무용수로 이름을 알렸다. 대학생인 지금은 발레 수업 때 맨 앞에 서서 마음껏 동작을 뽐낼 정도로 자신감이 넘친다.

어머니 이씨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죠. 앞으로도 이 아이가 하고 싶은 꿈을 다 펼칠 수 있어야 할 텐데…"라며 딸을 쳐다봤다. 백지윤은 어머니를 끌어안고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잘해서 볼쇼이발레단(러시아)에도 꼭 갈 거예요. 강수진(슈투트가르트발레단 수석발레리나) 언니도 저보고 '지윤이는 할 수 있어'라고 말해줬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