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앞에선 거침없는 '늑대 여인'

입력 : 2013.01.18 23:23

방한 연주 앞둔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 인터뷰

29일 내한하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 /크레디아 제공
프랑스 시인 랭보는 이렇게 노래했다. "A는 흑색, E는 백색, I는 적색, U는 초록색, O는 파란색, 모음이여"(시 '모음').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44)도 11세 때 비슷한 걸 경험했다.

"바흐의 '평균율 피아노 곡집(曲集)' 가운데 올림 바장조 전주곡을 연습하고 있는데 옅은 오렌지색 얼룩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다단조는 검은색, 라단조는 푸른색, 모차르트의 올림 마장조는 햇살처럼 눈부시게 밝았죠.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서 당황했지만, 너무나 즐거운 경험이었죠." 이 감각이 음악의 조성(調性)과 연관 있다는 걸 깨달은 건 훗날의 일이다.

18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연주할 때 기계적으로 색깔이 떠오른 건 아니었지만 꽤 규칙적으로 일어났다. 이런 공감각은 특히 조성이 중요한 바로크음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리모는 프랑스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매혹적 외모로 15세에 첫 음반을 발표한 이후, 세계 음악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섬세함과 우아함 대신, 때때로 대담하면서도 개성적 연주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좋은 징조라고 봐요. 논쟁을 위한 논쟁을 일으키고 싶진 않지만,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해석에는 옳고 그름이나 객관성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누군가 사랑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미워하고 있다는 뜻이죠."

그리모는 늑대 보호 재단을 설립하고 멸종 위기에 빠진 늑대 보호 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모든 동식물은 포식자를 갖고 있으며, 늑대는 먹이사슬의 상위에 존재해요. 늑대의 보존은 아직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인류가 삭막한 콘크리트 정글에서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2011년 5월 그는 또다시 작은 사건을 벌였다. 베를린 필의 전 음악감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을 녹음하던 그리모는, 불과 1~2분 남짓한 카덴차(협주곡의 독주) 채택 문제를 놓고 의견 충돌을 벌였다. 아바도는 작곡가 모차르트의 카덴차를 주장했지만, 그리모는 10대 시절부터 매료됐던 부소니의 카덴차를 고집했다.

아바도가 위암 수술 이후로 세계 음악계에서 '성인급' 예우를 받고 있는 인물이고, 1995년부터 그리모와 꾸준히 협연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척 대담한 반항이었다.

그리모는 "협주곡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자의 이견 조율이 필수적이지만, 독주만큼은 엄연히 연주자의 영역이며 '원칙의 문제'"라고 말했다. 답변을 들은 뒤에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는 기자의 표정까지 간파한 듯, 그리모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음악계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고, 이런 과정을 통해 점진적 변화도 생기니까요." 천진난만한 그의 미소에는 달콤한 미풍(微風)이 아니라, 격렬한 회오리바람이 감춰져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렌 그리모 피아노 독주회, 1월 29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1577-5266

김성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