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미술가들] 메두사가 환생했다 '오타쿠'적으로

  • 임근준 미술·디자인 평론가

입력 : 2012.12.24 22:55

화가 이윤성

이윤성의 2011년 작‘메두사(Medusa)’. /임근준 제공
화가 이윤성(27)은, 일본 망가·애니메이션 문화의 특성으로 서구 고전 회화의 주제를 탐구해나간다. 그의 2011년 작 '메두사'는 제 얼굴을 바라본 사람을 돌로 만드는 마녀 메두사 두상을 그렸다. 작품에 사용된 양식은 일본 애니메이션 팬 문화에서 창출된 '모에화(萌え化)'다. '모에(萌え)'는 '싹트다·타오르다'는 뜻의 오타쿠('마니아'를 뜻하는 일본어) 신어. 1차적으로 '애호하는 미소녀 캐릭터를 볼 때, 가슴에 솟는 흐뭇한 감정'이라고 설명되지만, 진화를 거듭해 단순한 취향이나 성적 페티시(집착) 이상으로 사물을 미소녀·미소년으로 전치시키는 일을 뜻하게 됐다.

이윤성이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도상은 제작자 불명의 메두사 조상(彫像) 사진 이미지. 메두사는 본디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해신(海神) 포세이돈과 아테나 신전(神殿)에서 정을 통했다가 분개한 아테나의 저주로 흉측한 괴물이 됐다. 영웅 페르세우스는 청동 방패에 비친 모습을 보고 메두사의 목을 단칼에 잘라 무찔렀다. 이윤성 그림에서 죽음을 맞은 메두사는, 흉측한 괴수가 아니라 행복한 얼굴의 미소녀다.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이는 '모에화'를 예술적으로 변용한 결과다. 고로 이윤성의 '메두사'가 오타쿠 문화에서 숭앙되는 미소녀의 일반적 특징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현대의 청년 하위문화에 맞춰 갱신하겠다는 화가의 뜻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얼굴뿐 아니라 뱀 머리카락까지 사랑스럽게 표현함으로써, '오타쿠' 문화의 '귀여움(가와이·可愛い)'에 대한 집착을 계승한다.

그러나 이윤성 작업에선, 원전성(原典性)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오타쿠' 특유의 동인(同人) 문화에 충성하는 모습은 찾기 어렵다. 일본산 망가·애니메이션을 보고 성장한 청년이지만, 그에게 '모에화'의 법칙은 어디까지나 현대적으로 고전을 재해석하는 필터나 재해석의 대상으로서 의의를 지닐 따름. 기존 작업에서 반복되는 대주제는 생성과 소멸의 순간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열락(悅樂), 즉 유한한 욕구를 넘어서는 큰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