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는 기쁨 닥종이 예술가, 김영희

입력 : 2012.12.14 16:40

멀리서 보면 화려한 재독 예술가, 가까이서 보면 생계형 엄마 김영희.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 그 후 20년이 흘렀다. 다섯 아이는 모두 장성해 독립했다. 김영희는 일흔을 앞두고 있다. 그가 말했다. 나이 듦은 늙음이 아니라 자유라고. 단풍 든 길목에 봄날의 김영희가 서있었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아파도 아파서는 안 되는 날들이 있었다. ‘아이를 잘 만들었던’ 여자는, 이 다섯 아이를 지키기 위해 새벽이면 창호지 한 장 한 장을 덧대어가며 작품을 만들었다. 닥종이 예술가 김영희에게 작품은 자신의 분신이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할 땐 한숨을 넣어 만들었고, 아들이 독일 학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 땐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만들었다. 김영희의 작품에 스타일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김영희의 현재를 담는다는 것. ‘한국보다 외국에서 더 잘 알려진,’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삶 뒷면에는 다섯  아이를 먹이고 입히던 어미의 삶이 있었다. 요즘에 들어서야 침대에서도 몸을 쭉 펴고 잔다는 어미 새는, 이제 자식을 모두 키워 날려 보냈다.

“아, 내 의무는 끝났다. 그러니 죽어도 된다. 글쎄 예순 넘어 죽은 부모 보내고 상심하는 자식들 보면 안됐더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 부모는 자식의 배경일 뿐이야.”
비로소 자유, 김영희의 일흔은 축복처럼 다가왔다.

엄마 끝, 여자 시작

30대에 열네 살 연하의 독일 남자와 결혼해 독일로 건너간 그는, 삶의 절반 정도를 독일에서 보냈다. 아마 처음 남편과 사별하지 않았더라면, 미술 선생님을 하면서 세 아이를 기르며 살았을 것이라는 그의 삶은 그때부터 예상치 못한 궤도를 향해 달려갔다.  “어떤 분들은 저를 부지런하다고 하고 또 독하다고도 해요. 검소하다고도 하고 성실하다고도 하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요.”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작품을 구상했다. 20년을 그렇게 살아 지금도 자명종 없이 그 시간이면 눈을 뜬다. 아이들이 깨기 전까지의 그 시간이 예술가 김영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남편 토마스는 학생이었고,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그녀는 가장이 됐다. 다섯 식구가 살던 집의 월세가 1천 마르크, 당시 간호사 월급이 한 달에 1천 마르크 정도였다. 돈이 떨어질 만하면 작품이 하나 팔리고, 또 떨어질 만하면 작품이 하나 팔렸다. 한 번 그의 작품을 산 이들은 전시가 있을 때면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보통 미술계에서는 한 작가의 스타일이 변하지 않아야 오래 사랑받고 많이 팔린다. 김영희 역시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작품은 그의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자존심이기도 했다. 치열하게 작품을 만들면서 행여 아이들이 (동양인) 냄새난다는 놀림을 받을까 봐 매일 옷을 빨고 다려 입혔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저는 알아요. 그때 토마스가 ‘이히 리베 디히(독일어로 ‘사랑한다’는 말)’라고 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만약에 사랑이 또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다면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때는 제 생애 그런 고백을 또 들을 수가 있을까, 그런 마음이었어요.”

토마스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김영희의 기사를 보고 반해 한국에 찾아왔었다. 그의 집을 직접 찾아와 작품과 아이들 사진을 찍었다. 당시 김영희는 닥종이 예술가로 이제 막 이름을 날리려던 참이었다. 독일의 미술관에서 김영희를 초청해 전시를 열었다. 그 전시에 토마스가 나타났다. 꾸깃해진 사진을 내밀며 말했다. “이히 리베 디히.” 1981년, 뮌헨 시립미술관에서 첫 유럽 전시를 하던 날이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딸 유진, 음악과 미술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윤수, 내성적이지만 속이 깊던 장수, 독일에서 태어난 봄누리와 프란츠, 이 다섯 아이는 모두 그에게 각별했다. 큰딸은 친정엄마처럼 의지가 되는 존재였고, 큰아들은 예술적인 영감을 주고받던 동지였다. 얌전하고 사랑 많은 장수가 또래의 독일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엄마인 그는 작품으로 아이를 위로했다.

매번 전시회를 열 때마다 <장수와 호박>, <장수의 가을>, <장수의 여름>이라고 이름 지어 그를 작품으로 빚었다. 꽃처럼 예쁜 딸 봄누리와 천사 같은 성품을 가진 프란츠를 낳고, 김영희는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녀 신세가 됐다. 한국을 잊으려고 생각도, 음식도, 소식도 일절 끊고 지내던 시절. 김영희의 마음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독일과 한국 사이 어디쯤을 부유하고 있었다. 내 힘으로 집 한 채와 스튜디오를 마련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결심과 함께.

독일 아이들도 가기 힘들다는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큰딸 유진은 훗날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엄마, 사실은 나 …결혼 안 하고 싶었어. 엄마 삶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일해야 하나 생각했거든. 애기도 안 낳고 싶었어. 밤낮으로 육아에 매달리는 게 싫었거든. 완전히 풀타임으로 일해야 하는 거잖아.”

엄마의 삶이란 게 기껏 먹고 싶다는 음식을 부랴부랴 만들어놔도 맛없다는 투정을 들어야 한다. 자식과 남편에게 “밥맛이 왜이래?” “구두 좀 닦아놓지.”라는 이야기를 듣던 삶이 끝났다. 남편 토마스와 헤어지고 아이들이 모두 독립하고, 이제야 스스로를 아낄 수 있는 시간이 왔다. 해서 엄마 과정을 수료한 자신을 다독이며 《엄마를 졸업하다》를 펴냈다. 옷장 가득 있었지만 전시 때 외에는 입을 일 없던 예쁜 옷들, 스스로를 여자로 만들어 주는 하이힐, 바라보기만 하던 미니스커트도 김영희는 꺼내 입어본다. 그리고 이야기해준다. ‘와, 아름답다.’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 설레는 건 똑같아요. 칠십이 되었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저는 노(老)해지는 건 괜찮은데 추(醜)해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얼굴에 있는 주름을 다 지우고 싶지는 않지만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어요.”
얼굴선을 따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눈매를 따라 그어진 아이라인, 몸에 맞게 재단된 코트를 입고 검은색 부츠를 신은 김영희는 2년 만에 찾은 한국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다. 그의 눈은 아주 검지도 않고 갈색도 아닌 밤색이다. 그 눈으로 카페며 카페 안의 사람들, 창밖의 풍경과 떨어지는 낙엽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본다.

독일에선 다섯 아이의 기둥 같던 엄마지만, 한국에 오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지인들의 보호를 받는다. 카페에서 물은 따로 시켜야 하는지, 레스토랑에 있는 직원들에게 팁을 주지 않아도 되는지, 독일에서는 쓰지 않던 휴대폰을 한국에서 쓰려니 얼마나 거추장스러운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말할 때는 정말 소녀의 얼굴이 된다.

“한국은 올 때마다 달라져서 놀라요. 젊은 사람들 보면 다들 얼마나 예쁜지. 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젊은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데, 굉장히 즐거워요. 일단 아직 선입견이 없어서 이야기가 느끼하지가 않거든. 젊다는 건 몸의 나이가 젊다는 게 아니라 생각이 열려있는 거예요.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젊은 사람들과의 대화가 훨씬 즐거워요. 무엇보다 여기에선 한국말로 해도 되니까 얼마나 신나요.(웃음)” 

다섯 아이와 그보다 훨씬 많은 닥종이 조형을 만들어낸 김영희의 손에 눈길이 머문다.
아이들과 의논해서 결정한 남편과의 이혼, 다시 찾아온 사랑

남편 토마스는 유진, 윤수, 장수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주었다. 혈육인 봄누리와 프란츠에게는 전형적인 독일 아빠의 모습이었다.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눈 밖에 벗어나면 엄격하게 대했다. 특히 여린 프란츠에게 냉정하게 대하는 토마스의 모습은 김영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처음부터 생계 유지는 김영희의 몫이었다. 독일에서는 남편이 부인에게 월급을 모두 가져다주는 일이 흔하지 않다. 생활할 수 있는 비용만 주고 그 목록도 체크한다. 부업을 하는 부인들이 많은 건 그래서다. 김영희의 작업은 부업이 아니었고, 때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었다. 그녀의 작품에 반해 사랑을 고백했던 그였지만 막상 뒤에서 말없이 외조해주는 남편의 역할은 맞지 않았다. 아이들 육아나 교육에 대한 의견 차이도 한몫했다. 남편은 일 때문에 오래 런던에 머물기도 했고, 떨어져 지내면서 가끔 만나는 기간이 길어졌다. 아이들이 장성하고 나서 토마스와 이별을 의논했다. 부부의 이혼은 모두의 상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와서 토마스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은 없어요. 제 일이 전시를 열고, 차려입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인데 그걸 언론에서 주목하고 제가 유명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걸 힘들어했던 거 같아요.”

딸 유진이 기업 인수합병 전문 변호사가 되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도 결혼에 생각이 없어 보일 때나, 셋째 장수가 불가에 귀의해 수도자가 되고 싶다고 할 때, 막내 프란츠가 학교생활을 순탄하게 하지 못할 때 엄마는 자신의 결혼이 행복하지 않았던 탓은 아닌지 마음을 졸였다. ‘직업과 배우자는 당사자가 결정하도록 하자’고 결심하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윤수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에 부모, 형제가 다 말렸는데도 굳이 우겨서 홍익대 미술학과에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 마음이 이랬겠구나. 봄누리가 혼자 프랑스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제가 독일에 간다고 했을 때 생각이 났죠.”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 프란츠에게는 같은 막내로서의 유대감이 있었다. 10남매 중 열째. 터울이 나는 언니, 오빠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외로운 기억이 떠올라 프란츠와는 단둘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전시를 할 때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는 매일 작업복을 입고 매일 책상 위만 보고 영수증만 보고 아이들 성적표만 보던 시절이에요. 지금은 새하얀 보름달도 보고, 마당에 피어있는 국화도 보여요. 독일에는 국화가 많이 피거든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가을’이라고 표현하는데, 저는 지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서 다시 봄에 서있는 거 같아요.”

2010년 그가 출간한 소설 《러브》는 60대에 찾아온 사랑 이야기다. 상대는 30대의 젊은 트럭 운전기사. 중년의 그에게 찾아왔던 20대의 토마스처럼, 60대의 주인공 앞에 나타난 트럭기사는 그녀에게 순정 100%의 사랑을 전달한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이 두방망이질 친다.
‘늙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좀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사랑을 느끼는 건 나이와 상관이 없는 건데요.’

최근 들어 처음 연애편지라는 것도 써봤다. 여러 권 책을 냈고 그때마다 원고는 직접 손으로 원고지에 썼다. 집에는 그의 친필로 쓴 원고지가 수북하지만, 사랑 고백을 담은 편지는 난생처음이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처음 쓴 편지는 찢어버리고, 애써 점잖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는 다시 빼고 싶어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고 한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풍경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영희는 2~3년 간격으로 한국에 온다. 그녀가 오면, 우리는 그녀와 그녀의 전시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부산에서 열린다. 〈김영희 회화와 종이 조형전〉.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유리판을 얹은 후 물을 뿌렸다. 그의 작품은 매번 새롭다.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하는 게 대중적인 인기를 위해서는 좋아요. 외국의 유명한 화가들도 보통은 그렇죠. 하지만 난 아니에요. 결국은 ‘나를 위해서’ 작품을 만드는 거니까 타협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느끼는 것, 표현하고 싶은 걸 만들어요. 그래서 계속 변하죠.”

그의 작품은 어떤 시기를 지나느냐에 따라 다른데, 공통점은 그것이 ‘그때의 김영희’라는 것이다. 2백만 부가 넘게 팔린 전설적인 작품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에서 그는 ‘예술이 내 몸을 떠나 고상한 이념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은 나는 천금을 줘도 받아들일 수 없다. 우선 내가 위로받아야 하므로’라고 썼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에게 예술의 존재 이유는 ‘사랑’이다. 그 말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을 맞았다는 그에게 “늙어도 사랑이 찾아오느냐”는 질문은, 때문에 너무 낡은 질문이었다.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유슬기 기자 | 사진 박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