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새롭고, 이토록 무서운 창극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2.11.21 23:44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
객석은 검은 호수로 둔갑, 산발에 소복 입은 귀신 없어… 창극의 정형성 벗은 도전작

영화계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도 이 장면을 봤다면 "졌소"라며 돌아섰을 것이다. 그토록 무섭다는 '사이코'(1960)의 샤워 장면을 능가할 광경이 지난 20일 장충동 국립극장 창극단 연습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누나는 무슨 누나! 피도 반밖에 안 섞인 누나야. 해! 해!" 무의식의 부추김을 받은 남동생 배장수가 야구방망이를 집어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누나 배장화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고 옷을 벗었다. 심벌즈가 겁에 질린 소리를 내자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연습실 가득 퍼졌다.

창극단 연습실에서 샤워 장면이? 대중이 알던 창극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스릴러 창극 '장화홍련'이 오는 27일 개막한다. 장수의 공격을 받은 장화의 피가 낭자하게 사방으로 튀면서 죄의식도 함께 분출한다. 붉은 피는 씻으면 씻을수록 들러붙으면서 등장인물을 광기(狂氣)로 몰고 간다.

듣기만 해도 섬뜩한 이 작품의 연출은 보는 이의 무의식을 들추고, 쑤시고, 후비는 것으로 이름난 한태숙씨가 맡았다. 한씨가 극작가 정복근씨와 함께 2001년 연극으로 올렸던 '배장화 배홍련'을 창극으로 손봤다. 한씨는 "고전소설 중 가장 극적이고 참혹한 이야기라서 선택했다"며 "창극이 되니 연극이었을 때보다 훨씬 진해졌다"고 말했다.

기존 창극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줄‘장화홍련’. 코러스 배우들이 사건 목격자이자 관객의 대리인으로 잠자는 죄의식을 파고든다. /국립창극단 제공
무대도 무섭다. 관극(觀劇)의 밀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1500석 해오름극장의 무대와 객석을 뒤바꿨다. 객석이 있던 자리는 두 처녀가 수장된 검은 호수가 됐다. 호수 주변에는 한 서린 머리를 풀어헤친 듯 가늘고 긴 가지를 일렁이는 나무가 있다. 객석은 627석으로 줄어들어 무대를 디귿(ㄷ)자로 둘러싼다. 배우는 관객의 시선에 포위당하고, 관객은 스릴러의 자장(磁場)에 포박당한 채 함께 공포의 세계로 간다.

이 작품에 머리 풀고 소복 입은 장화나 홍련은 없다. 두 자매는 21세기 서울 한복판 20대 여성으로 원피스를 입고 결혼과 유학에 대해 고민한다. 배경이 현재성을 입으면서 성격도 입체적으로 다듬어졌다. 착하거나 나쁘다는 잣대로만 단언할 수 없는 양면성과 어둠을 드러낸다. 나쁜 계모의 악행이 아니라 가족 간의 무관심과 이기주의에 초점을 뒀다. 사건의 목격자인 코러스는 관객을 대변한다. 자매의 살인과 시신 유기를 목격하는 그들은 관객에게 외친다. "괴물은 바로 당신들이야!"

20일 연습 장면은 무대 언어로서의 창의 힘과 매력을 분명히 보여줬다. 소리에 강한 창극단 배우들의 절규는 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샅샅이 훑어 올라오는 듯 처절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일상적으로 들렸던 '아니' '왜' 등의 외마디 대사가 창극이 되니 극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오싹한 계단이 됐다.

'장화홍련'은 극예술로서의 창극의 미래에 대한 대담한 도전장이다. 창극은 정형성이 특징인 장르. 안전한 매력을 벗어던졌다는 점에서 큰 모험일 수 있다. 창극단 측에서는 기존 창극 팬의 반응이 어떨지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이것도 창극이냐!"는 질타가 나올 수도 있다.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창극이 고정된 일부만 즐기는 장르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사랑받을 장르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장화홍련' 27~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2280-41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