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0.14 22:45

틀에 박힌 초상화의 꼴이 있다. 머리에 번듯한 오사모를 쓰고, 가슴과 허리에는 벼슬의 높낮이를 알려주는 흉배와 각대를 두른다. 옷은 색깔이 다르더라도 깃이 둥근 관복(官服) 차림이라야 한다. 손은 소매 안에서 맞잡은 채 장식이 멋진 의자에 앉아 발은 여덟 팔 자로 벌리고 눈은 차분히 한쪽을 바라본다. 이런 형식으로 등장하는 모델이라면 그 정체가 뻔하다. 공신(功臣)들로 보면 된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은 여러 특혜를 누리는 영광에다 최고의 화가가 그린 초상까지 덤으로 받았다.
이 작품도 공신상(功臣像)이다. 흉배로 보건대 주인공은 문관 3품이다. 구름 사이로 꿩을 닮은 백한(白�l)이란 새가 활개를 친다. 이색지게 보이는 카펫이 바닥에 깔렸는데, 조선 중기의 공신상에 흔히 나오는 치장이다. 얼른 봐도 표정이 음전하다. 제법 발그레한 입술을 힘주어 다무는 바람에 뺨에 서너 개 주름살이 퍼졌다. 눈빛은 초롱초롱하고 살빛은 고른 편이다. 그래서일까, 나잇살이 보이지 않고 배젊은 느낌이 든다. 한데, 코밑과 턱 아래가 민숭민숭한 게 좀 이상하지 않은가. 수염이 한 올도 없다. 이분, 내시다.
어떻게 내시가 공신이 됐을까.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주로 피했는데, 그때 호위하던 신하 80여 명이 '호성(扈聖)공신'이 됐다. 1등에 이항복, 2등에 류성룡 등 명신(名臣)이 있었고, 3등에 이례적으로 내시 24명이 뽑혔다. 3등 공신이던 김새신(金璽信·1555~1633)이 바로 이 초상 속의 내시로 전해진다. 김새신의 행적이 자세하지 않아 학자들은 아직 추정작으로 본다. 내시는 양반보다 수명이 길다는데, 김새신은 여든 가까이 살았다.
'내시 이 앓는 소리'란 속담이 있다. 매가리 없는 목청으로 지루하게 내는 소리를 뜻한다. 강해서 오래가기보다 오래가서 강한 것도 있다. 최초의 내시 초상으로 길이 남을 김새신의 묘는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