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10.12 10:26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현악과 박사 1호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다고 하면 해외 유학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 보니 국내파 음악인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혹자는 서양 음악 본고장의 교육 수준과 비교해보면 아직은 한참 모자란 것이 국내의 현실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제는 과거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국내 클래식 음악계도 당당히 1호 박사학위 취득자를 배출해냈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궂은 날이었다. 그러나 한 치의 흐트러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단정한 매무새의 바이올리니스트 최정현(30)을 보고 있자면 밖의 날씨는 마치 다른 세상 사정 같기만 하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가느다란 느낌의 고운 선은 흡사 그녀가 평생을 함께한 바이올린과 참 많이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다는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정말 백조와도 같아요. 겉모습은 우아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거든요. 악기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하루’를 쉰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일 정도로 쉼 없는 삶이거든요. 정돈된 외모도, 결국은 무대에 오르는 음악가의 연주 중 일부이기 때문에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도 있고요. 겉보기보다 훨씬 고달픈 면이 많아요.(웃음)”
조심스러운 행동과 단정한 표정에서 오는 거리감에, 속된 말로 ‘음악 하는 여자’ 특유의 예민함이나 까다로움이 있지는 않을까 선입견이 아주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그런데 의외로 소탈한 면모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젊은 음악가여서일까. 그러나 비주류적 감성으로 바라보기엔 최고 스펙을 자랑하는 주류의 선두에 서 있는 탓에 선뜻 진심을 본 것이 맞을까 의심 아닌 의심을 가져본다. 그러나 이 의욕적이며 능동적인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무대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며 점점 타인을 자신에게 동화시켜나갔다.
“‘왜 바이올린을 하느냐’, 혹은 ‘바이올린이 왜 좋냐’ 같은 질문을 참 많이 받아요. 특히 일반인분들에게요. 뭔가 그럴듯한 답을 해드리고 싶지만 그때마다 참 곤혹스러워요.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요.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왜 좋은지 이유를 대지 못한다잖아요. 바이올린이 제게 그래요. 그냥 좋아요.”
꾸미거나 과장하는 법이 없는 최정현은 사실 국내 음악교육이 이루어낸 쾌거이자 결실이다. 조금은 꾸미고 과장해도 되는 사람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바이올리니스트 최정현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배출한 현악과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향한 정석의 길
“청중이 있는 그곳이 바로 제가 서고자 하는 무대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최정현이 밟아온 코스를 살펴보면 단 한 번의 외도 없이, 혹은 단 한 번의 슬럼프 없이 일정 수준의 레벨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공부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이뤄낼 수 없는 이력이 아닐 수 없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 그리고 서울대 음대로 이어지는 그녀의 음악 공부가 얼마나 혹독했을까,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뿐만 아니라 서울대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총장상을 수상할 정도로 마무리까지 화려하다. 누구라도 국내 음악계의 최고 엘리트 과정을 수료한 최정현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학파들을 더 알아주는 풍토를 모르는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일곱 살 나이에 처음 바이올린을 만나 지금껏 음악을 공부해오면서 생긴 국내 환경에 대한 신뢰도 있었고요. 사실 어디서 공부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공부하느냐 관건 아니겠어요? 발전하는 사람들은 원래 성실하게 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악기 앞에, 음악 앞에 진심을 다한다면…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국내에서의 학위 수료 과정이 매우 혹독했음을 살짝 고백했다. 일반인들은 자국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게 더 쉬울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실상을 그 반대라는 것이다. 정말 까다롭기 그지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빨리 공부를 끝내고 싶으면 외국 유학을 가라”고 조언한 교수가 있었을까. 게다가 외국 대학은 실기만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하는 ‘연주 박사’라는 과정이 있지만, 국내에서는 이론에 대한 논문까지 준비해야 해서 공부 양이 훨씬 많았다. 더구나 학교 측에서는 ‘순수 국내파 현악과 1호 박사 배출’이라는 부담감에 더욱 엄격하게 가르치고 심사했다고.
“실기 과정이 3년인데요. 그 기간 동안 독주회를 의무적으로 네 번 해야 해요. 성격을 각기 달리 해서요. 한 번은 현대 작곡가의 곡으로만 연주하고, 한 번은 반주 없이 바이올린 독주로… 곡에 대한 해설을 곁들여가며 하는 연주도 있어요. 그렇게 네 번을 해야 비로소 논문 자격시험을 볼 수 있는 거죠. 통과 기준이 매우 높은 데다가 연주회는 평소 준비가 관건이라 애를 먹었어요. 돌이켜보면 가장 힘들고 고된 시간이었어요.”
후배들에게 교육자를 넘어 좋은 멘토이고 싶어
최정현은 이론과 실기, 즉 학문과 연주에서 균형 있게 이룬 역량이 무엇보다 높이 평가되는 음악가다. 이것은 가장 큰 강점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오사카 국제 콩쿠르 수상, 음악춘추 콩쿠르 1위, 한국일보 콩쿠르 3위 등 각종 콩쿠르에서 수상하며 차세대 유망주로 국내 음악계에서 주목을 받아왔던 연주자이다. 또한 서울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 정기 연주회 협연과 불가리아 슈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등을 통해 무대 위에서의 뛰어난 연주 실력 또한 증명해보였다. 그리고 이제 ‘순수 국내파 현악과 1호 박사’라는 타이틀을 더하면서 사람들의 기대감을 다시 한 번 한껏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다.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천재는 ‘나는 천재야!’라고 말하지도 않을 거고요.(웃음) 음악 공부의 정석이 무엇이냐 고민하면서 성실하게 지내온 시간이었어요. 거창한 꿈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어떻게 공부하고 연습해야 음악적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 후배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교육자이자 좋은 멘토가 되어주고 싶을 뿐이에요.”
겉보기에는 매우 클래식한 이미지의 학구적인 연주자였지만 그 안의 열정만큼은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젊고 의욕적인 차세대 음악가였다. 가녀릴 것만 같았던 첫인상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마디의 대화로도, 한 번의 연주로도 바이올리니스트 최정현의 음악에 대한 진심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1호’라는 타이틀의 행보를 기대해도 좋겠다. 그녀는 충분해 보였으니까.
/ 여성조선 (http://woman.chosun.com/)
취재 강은진 | 사진 강현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