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을 품은 '宮'

  • 김기철 기자

입력 : 2012.09.11 23:41

['덕수궁 프로젝트' 19일부터]
고종의 슬픔 담긴 함녕전, 순종이 아내 잃은 석어당… 조형·영상으로 운명 담아내
영욕의 조선 왕실史 표현 "궁궐과 현대미술 접목 처음"

덕수궁 석어당(昔御堂)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란 갔던 선조가 서울에 돌아와 머문 곳이다. 전쟁으로 피폐한 도성과 백성을 보며 한숨짓던 선조가 세상을 떠난 곳도 바로 이곳. 순종은 황태자 시절 석어당에서 첫 아내를 잃었다. 작가 이수경은 순탄치 않은 삶을 지켜본 이 건물에 '눈물' 조각을 설치한다. 눈물 한 방울이 응결된 것 같은 이 조각에 수천 개의 LED 조명이 비치면서 슬프지만, 아름다운 모양이 탄생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의 운명을 그려냈다는 설명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4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덕수궁이 우리 현대미술과 만난다. 19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의 문화유산을 재해석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덕수궁 프로젝트'전이다.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석어당 등 덕수궁의 6개 전각과 후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다. 서도호, 정영두, 이수경, 임항택, 김영석, 정서영, 류한길, 류재하, 하지훈, 성기완, 최승훈, 박선민 등 현대 미술계의 작가, 디자이너, 무용가, 음악가 12명이 참여한다.


 

작가 이수경씨가 덕수궁 석어당에 설치한 조각‘눈물’. 석어당을 거쳐 간 왕들의 슬픈 운명을 표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옥을 모델 삼아 천으로 집을 지어 세계 곳곳에서 전시회를 가진 '집의 작가' 서도호는 함녕전에 도전한다. 고종이 1907년 강제퇴위당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침전(寢殿)이 함녕전이다. 서도호는 아내를 잃고 나라까지 빼앗긴 군주의 외로움을 담아내려 했다. 먼저 함녕전 동온돌 바닥을 깨끗이 닦고, 마름꽃 무늬가 있는 능화지(菱花紙)로 깔끔하게 도배해, 주인 잃은 침실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고종이 잘 때, '보료 세채'를 깔았다는 상궁 증언에서 영감을 얻어 안무가 정영두와 함께 고종 침실에서 일어났을 일을 퍼포먼스로 재현했다. 서도호는 "고종이 먼저 세상을 뜬 명성황후와 엄비를 생각하며, 보료 세채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한다. 이 과정을 담은 영상작품을 덕수궁미술관에서 전시하고, 함녕전에도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를 설치했다.

함녕전 바로 옆 군주의 집무공간인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신주를 모시던 경효전이 있던 곳이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한 후인 1912년 덕홍전으로 바꿔 불렀다.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은 은빛 크롬으로 마감한 의자를 바닥 가득 깔았다. 벽과 천장의 무늬가 울퉁불퉁한 의자 표면에 비치고, 다시 반사하면서 왜곡과 변형이 증폭된다. 관객이 안을 서성거릴 때, 사운드 아티스트 성기완의 음악과 함께 여인의 흐느낌, 찻잔 부딪치는 소리,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고층 빌딩이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이는 덕수궁 연못가 숲에선 그림자놀이가 펼쳐진다. 이곳엔 원래 궁궐 업무를 맡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1930년대 덕수궁 공원화 사업 때문에 건물은 대부분 철거됐고, 1960년대엔 연못 일대에 스케이트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작가 최승훈과 박선민은 이 숲 속에 그림자놀이 영상을 설치한다. 창문 틈으로, 또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여유를 체험하게 해준다.

전시회를 기획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인혜 학예연구사는 "국내에서 궁궐과 현대 미술을 접목시킨 사례는 거의 없었다"면서 "덕수궁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예술가의 상상력과 해석으로 풀어냄으로써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는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