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자씨(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마녀… 관객을 울린다, 웃긴다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2.06.16 03:05

[연극 '봄의 노래는…' 어머니役 열연 고수희]
연출가 정의신과 3번째 작업, 가장 슬픈 장면이 제일 웃겨
"엄마 역은 늘 괴롭고 아파… 객석에 엄마 오신 날엔 유달리 감정이 북받쳐요"

영화‘친절한 금자씨’에서의 고수희. /모호 필름 제공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를 봤다면, 배우 고수희(36)를 잊지 못할 것이다. 영화 속 그녀는 간통한 남편과 내연녀를 살해하고 구워 먹은 '마녀'. 원래 박찬욱 감독은 그녀를 마녀에게 괴롭힘 당하는 여자 역에 쓰려고 했다. 여자의 이름도 그래서 오수희. 하지만 연극 '선데이 서울'(2004)을 본 박 감독은 말했다. "대본을 고칠 테니 기다려라." 고수희가 맡은 배역은 사이비 교주였다.

◇이번엔 정의신과 만났다

그는 '선데이 서울' 사이비 교주 역의 모델이 된 실제 사이비 여교주를 '최고의 배우'로 꼽았다. 배역을 맡고 고수희는 물어물어 그들의 집회 장소로 찾아갔었다. 경기도 포천 허허벌판, 저 멀리서 "주여!"라는 고함이 들려왔다. 비닐하우스 속 단상에서 교주가 외쳤다. "여러분이 가진 그 선풍기는! 하늘의 그분께서 주신 것입니다! 24시간 모터가 돌아가도! 뜨거워지지 않아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면 암도 다 나아!" 수백명이 교주가 파는 선풍기를 샀다. 목을 짓누르듯 짜내는 교주를 보고 고수희는 무릎을 쳤다. 그 목소리를 흉내 내다 공연 끝 무렵에는 성대 결절이 됐다고 한다. "그래도 그 덕분에 박찬욱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됐지요."

박찬욱의 마음도 움직이게 했던 '연기 귀재' 고수희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과 3번째로 뭉친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제작 미추·남산예술센터)에서 다시 어머니로 나온다. 14일 공연장인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에서 만난 고수희는 "제안을 받았을 때 싫다고 전화기 붙잡고 울었다"고 했다. "엄마 역은 괴롭고 아파요. 저희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대에서 생생하게 떠올리게 돼서요." 모친 얘기를 꺼내던 그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저희 엄마가 전쟁고아였거든요. 동대문 새벽시장에서 옷 팔아 3남매를 키웠어요. 객석에 엄마가 있는 날은 유달리 감정이 북받쳐요."

고수희는 1960년대 일본 간사이에서 한국식 곱창집을 운영하는 재일교포 이야기인 '야끼니꾸 드래곤'(정의신 작·연출)에서 "약하지만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탁월하게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으며 요미우리연극상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봄의 노래'에서도 관객의 눈물샘과 웃음보를 동시에 쥐었다 놓는다. 가장 슬픈 장면이 제일 웃긴다. 누군가의 슬픔이 타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안겨주는 삶의 모순이 쨍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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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연극‘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공연장인 서울 중구 남산예술센터에서 만난 배우 고수희는“어머니 역을 다시 맡으며 나를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뒤에 보이는 의자는 1930년대 실제 이발소에서 쓰였던 80년 된 골동품이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작품에서 고수희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일본군이 주둔한 전라도 가상의 섬에 사는 네 자매의 어머니다. 극의 절정 부분, 딸 하나를 일본군 총에 잃은 그는 일본군 장교에게 "내가 니 뼈를 씹어먹어도 속이 안 풀린다"며 울부짖는다. 그 장교는 나중에 다른 딸과 결혼해 사위가 된다. '그토록 미워했던 인간이라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연극계의 프리마돈나

정의신은 고수희를 "나의 영원한 마돈나이며, 마음의 여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봄의 노래'에서 격정을 쏟아낸 고수희가 "너무 힘들다, 계속 하면 죽을 거 같다"고 푸념했다. 정의신은 딱 한마디 했다.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

고수희는 '정의신의 마돈나'이기 전에 연극계의 프리마돈나다. 연출가 박근형은 그에게 "배우란 관객의 마음을 만져주는 사람"이라고 가르쳤다. 수년 전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를 할 때였다. 잘 다가오지 않았다. 어느 날 한 관객이 분장실로 찾아와 넋 놓고 울었다. "그때 알았어요. 제가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만지고 있다는 것을. 그 후로는 매 공연 직전에 기도를 드려요. '오늘 온 관객들의 마음을 잘 만져줄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고요."

'봄의 노래'는 고수희가 시원한 맥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끝난다. 연속으로 세 잔이다. "너무 힘들게 도착한 엔딩이니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 해냈어, 한방에!' 하는 그 느낌." 그 맛이 바로 연극의 맛, 영화 스크린이나 TV 화면과 바꿀 수 없는 살아있는 무대의 맛이다.

▲연극 '봄의 노래는 바다에 흐르고' 7월 1일까지, 남산예술센터,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