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객석에서] 브레히트의 냉소, 현대 해학을 만나다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2.05.13 23:25

창작 판소리 '억척가' 이자람

지난 11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소리꾼 이자람(33·사진)의 창작 판소리 '억척가'의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극장 출입문 앞에서는 200여 명의 관객이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공연은 지정석 없이 선착순 입장. 조금이라도 좋은 좌석을 잡으려는 줄이 길기만 했다. 17일까지 닷새 공연 전석(2500여 석)이 매진된 것도, 줄 서서 공연 관람을 기다리는 것도 오랜만의 풍경이었다.

'억척가'는 브레히트의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을 바탕으로 한 창작 판소리.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창작 판소리는 충분히 실험적이지만, 대중적인 만남은 아니다. 이 묘한 결합이 지난해 초연 이후 인기몰이를 하는 데는 몇 가지 성공 비결이 숨어 있었다.

브레히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창작 판소리‘억척가’에서 이자람은 작창과 소리, 연기까지 소화하는 괴력을 보였다. /LG아트센터 제공

우선 지극히 현대적인 언어. "정보는 많지만 믿을 뉴스는 없다"는 사설처럼 철저하게 눈높이를 21세기에 맞추면서, '허니문베이비''히치하이킹' 같은 외래어를 과감하게 끌어들였다. 고색창연한 사자성어를 모두 떨어내고 현대 구어체의 사설로 오늘날 청중에게 바짝 다가갔다.

랩을 듣는 듯한 언어유희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으로 고된 시집살이의 괴로움을 털어놓다가도 은근슬쩍 '시금치' 같은 말을 눙치듯 집어넣고, '메가폰, 이어폰, 아이폰'같은 각운(脚韻)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권력의 쟁패 대신에 민초의 삶에 초점을 맞춘 전복적(顚覆的) 재미도 빠질 수 없었다. 원작의 배경인 30년 종교전쟁을 삼국지연의로 옮기면서, 이자람은 마치 영화 '황산벌'처럼 민초들의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관객의 각성과 참여를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서사극과 공통분모가 있었지만, 원작의 차갑고 냉소적인 시선 대신에 해학과 골계미를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판소리와 맥이 닿고 있었다. 작창(作唱)과 소리, 연기를 맡은 이자람은 목소리 톤과 표정 변화만으로 1인 4~5역을 동시에 소화하는 괴력을 보였다. 둘째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억척 어멈을 노래한 앞마당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귀기(鬼氣)마저 감돌았다.

다섯 살 때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로 시작하는 '내 이름 예솔아'를 불렀던 꼬마 가수 이자람이 소리꾼을 거쳐 어느덧 예인(藝人)으로 성장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자리. 괜히 줄지어 입장하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