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랑랑·바렌보임에 의해 다르게 태어나다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2.04.05 23:34

[클래식 ABC] 감성적 스타일 빼닮은 랑랑, 이지적 면 중시하는 바렌보임

화려한 기교와 현란한 몸놀림, 다분한 스타성까지 어쩌면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리스트(1811~1886)와 닮아 있는 우리 시대의 연주자를 꼽으라면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30)이 아닐까 합니다. 랑랑은 다섯 살 때 데뷔 독주회부터 리스트의 음악을 선보였고, 이미 11세 때에는 '헝가리 광시곡'을 연주했지요.

지난해 리스트 탄생 200주년에도 그가 이 작곡가를 건너갈 리 없었습니다. 세계무대에서 리스트의 곡으로 협연과 독주회를 연달아 가졌던 그의 실황 영상(DVD)이 최근 국내 소개됐습니다.

피아니스트 랑랑의 리스트 독주회 실황을 담은‘리스트 나우(Liszt Now)’. /소니클래시컬 제공
지난해 7월 영국 런던 북서부의 라운드하우스에서 열렸던 독주회에서도 공연장 내부에 5개의 대형 영상을 설치해서 마치 팝 콘서트처럼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전광판에는 '60초 후에 공연 시작'이라는 사인이 뜨면서 자연스럽게 환호를 끌어내지요. 가요 프로그램처럼 드라이아이스가 만드는 안갯속에 등장한 랑랑이 리스트의 '캄파넬라'를 연주하면 관객들은 일제히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촬영에 여념이 없습니다. 랑랑도 "일상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접하지 않는 젊은 층을 배려하고 싶다"면서 대중성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않습니다.

공개 석상에서 자신이나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묶어서 들려주는 리사이틀의 창안자가 바로 리스트입니다. 100여 년 전 리스트가 불편한 마차를 수십 시간씩 타고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귀부인 관객들을 사로잡았다면, 현재 랑랑은 비행기를 타고 세계 전역을 누비며 갈채를 받는다는 점이 차이겠지요. 인터넷과 제트기의 시대에 랑랑은 '리스트의 현신(現身)'처럼 보입니다.

반면 리스트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던 피아니스트도 작곡가를 향한 경배의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유대계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70)은 지난해 자신의 음악적 스승인 피에르 불레즈(87)의 지휘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2번을 협연했지요. 이 실황 음반과 영상도 국내 소개됐습니다.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2번을 협연한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왼쪽)과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 /유니버설 뮤직 제공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지적 접근을 선호하는 바렌보임에게 리스트는 그리 친숙했던 작곡가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바렌보임은 리스트를 '피아노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리스트의 헝가리·슬라브적 면모는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이 계승했고 리스트 연주의 우아함은 프랑스가 물려받았으며, 이지적인 면모는 독일과 이탈리아로 건너갔다"고 역설합니다.

이 연주회에서 바렌보임은 자신이 이끄는 악단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지휘봉을 불레즈에게 넘기고 오로지 피아노 연주에만 집중합니다. 둘이 합쳐 157세인 이들 노장은 리스트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던 사위 바그너의 관현악을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과 병치하면서 독일 낭만주의의 계보를 진지하게 되짚어갑니다. 이렇듯 대조적인 두 연주를 통해 리스트가 얼마나 다층적(多層的) 성격의 음악가였으며, 그의 음악적 반경이 얼마나 드넓은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