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간 아무도 안 샀다… 이젠 두바이 왕자도 탐낸다

  • 곽아람 기자

입력 : 2012.04.03 03:10

'세계서 러브콜' 조각가 이재효
2006년부터 작품 판매 돼… 세계 유명 호텔마다 소장
"돈 벌려고 작업하진 않는다 조각은 유행 많이 타는 장르, 그 시기를 잘 만났을 뿐"

1992년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이 조각가는 2005년 네 번째 개인전까지만 해도 단 한 점도 작품을 팔아본 적이 없었다. 1998년 일본 오사카 트리엔날레에서 조각 대상을 받았고, 2000년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정기적 밥벌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선배 조각가 일손을 돕거나 선물가게용 소품 등을 만들면서 생계를 꾸렸다. 두 딸이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조각가'로 적을 때마다 겸연쩍었고, '나 하나 좋자고 가족만 괴롭히는 것 아닌가' 죄책감도 많이 느꼈다. 대학 졸업 후 14년 만인 지난 2006년 부산에서 연 다섯 번째 개인전에서 나무판에 못을 박아 만든 4000만원짜리 설치작품 등 2점이 팔린 것이 첫 작품 판매다.

그후로 6년, 이재효(46)는 이제 '세계 곳곳에서 러브콜 받는 작가'가 됐다. 서울 W호텔 로비에는 두충나무로 만든 지름 60~150㎝짜리 공 15개로 구성된 '미로'가 놓였다. 여의도 63빌딩 앞에는 지름 12m 원 안에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높이 12m, 9m, 6m짜리 나무 42그루씩을 빼곡하게 심은 2006년작 '생명의 숲'이 설치됐다. 서울 메리어트호텔, 스위스 인터콘티넨탈호텔, 베를린 그랜드 하얏트호텔, 미국 MGM호텔, 중국 파크하얏트호텔에도 작품이 소장됐다. 최근 열린 두바이 아트페어에서도 2500만원짜리 의자 형태 나무 작품이 두바이 왕자에게 팔리는 등 호평을 받았다. 디자인적 측면이 강해 미술작품인 동시에 탁자·의자로도 사용 가능한 것이 이재효 작품의 강점. '디자인'이 중시되는 시대가 오면서 그의 작품도 수요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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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사에 돌을 매단 작품‘0121-1110=1080815’(2008)와 함께한 이재효. 그는“돌은 바닥에 놓여 있는 게 자연스럽지만 예술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이도록 하는 일이라 돌을 허공에 매달았다. 내 작품은 무게가 많이 나가 천장이 무너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미술관처럼 특수한 장소가 아니면 거의 설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어서 작업하는 작가가 어디 있겠나. 하다 보니 내 작품이 팔리는 시대가 왔다. 조각은 특히 유행을 많이 타는 장르인데, 운 좋게 내 작업과 유행이 잘 맞아떨어지는 때가 온 것 같다."

이재효 개인전 '자연을 탐(探)하다'가 5월 27일까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린다. 대학 졸업 후 20년간의 작업을 총망라한 중간 회고전으로 설치작업 200여점을 비롯해 초창기 드로잉, 조각 소품 등 300여점이 나왔다.

개울가의 돌, 벌목장의 나무 토막, 녹슨 못 등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빛바래고 말라 비틀어진 자연물이나 폐기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 이재효 작업의 특징. 이번 전시회에도 6m 길이의 철사로 묶은 돌 수백 개를 천장에 매달아 구멍 뚫린 원기둥을 만든 '0121-1110=1080815'(2008), 키가 다른 떡갈나무 토막을 빙 둘러 반원 형태를 만든 '0121-1110=112031'(2012) 등을 비롯해 떡갈나무 낙엽을 수백 장 겹친 후 실에 꿰어 천장에 매달거나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어 장막처럼 드리운 작품 등이 나왔다. "내 작업의 절반은 내가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재료가 한다. 자연적 재료에는 에너지가 충만하다. 그 에너지를 빌려 와 재료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형태를 만들 뿐이다."

서울 W호텔 로비에 설치된 이재효의 2004년작‘미로’. /성곡미술관 제공
주변에선 농담 삼아 '재료값 안 드는 작가'라고 부르지만 그는 "대신 인건비가 많이 든다"고 항변했다. 실제로 그의 경기도 양평 작업실에서는 손재주 좋은 마을 사람 15명이 조수 역할을 하며 나무껍질 벗기고, 토막 내며 함께 일한다. 부인 차종례(44)씨도 나무를 재료로 삼는 조각가다.

이 작가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내 작품에 구(球)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했다. (02)737-7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