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3.17 03:13
김성녀 국립창극단 신임 감독
'남편은 국립극단, 아내는 창극단… 부부가 둘이 다 해먹는다' 뒷말 귀에 선했지만 '결심'
"갈라진 조직의 화합 이룰 것"
단 하나도 거저 얻은 것이 없는 인생이었다. 남편은 경상도 선비 집안 8남매의 장남이었다. 6남매 맏딸하랴, 8남매 맏며느리하랴. 판소리하고 연극하랴, 아침 해가 전투 나팔이었다. 홀로 8남매를 키운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도 맵고 셨다. 제일 자신 있는 게 제사 음식이 됐다. 뭐든 하면 죽기살기로 했다. 그래서 여성적이고 온화한 외모와 달리 '쌍칼'이라는 별명도 있다. 남편이 대표였던 극단 미추에서는 그가 의견을 내놓으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쑤군댔다. "아내로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하는 말"이라며 맞서 싸웠다. "사회생활하면서 투쟁은 피할 수 없어요. 싸움이 무서우면 집에서 살림해야죠." 남편이 국립극단을 맡은 후에는 미추 대표를 맡아 많게는 70명 단원이던 극단을 챙겼다.
그는 무뚝뚝하다고 알려진 손 감독에 대해 "연애 시절, 차비도 없으면서 비발디 사계 레코드 사주던 속 깊은 사람"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다가 "집에서도 책만 읽고, 재미가 없긴 하다"고 인정했다. 결혼 후, 한 사람은 월급을 벌어야 했다. 손 감독이 군 방송 피디로 들어갔다. 3개월 후, 아이를 낳은 김성녀가 국립창극단에 취직했다. "당신은 예술하라, 돈은 내가 벌겠다"며 TV와 라디오에 나갔다. 손 감독은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연극에 뛰어들었다. 손 감독이 다시 월급을 가져다준 건 그로부터 32년 후, 2010년 국립극단 예술감독 취임 때부터다. "시댁에서 '월급 나오면 네가 다 가로채라'는 특별 지시가 내려왔어요. 요즘은 제 통장으로 받아요."
대학을 서른여섯에 들어갔다. 모친 박옥진(1935~2004) 여사는 병을 달고 살았다. 극단에서 간식비로 나오던 것을 겨우 모아서 학비로 대줬다. 고등학교까지만 간신히 졸업했다. 30년 전 연극판은 선민의식이 팽배했다. 대학교 연극반 출신이 '시대를 고민한다'며 목에 힘을 줬다. 고졸 여배우를 두고 "어디서 굴러먹던…" 이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를 악물었다. 딸과 아들 둘을 낳고, 서른다섯에 학력고사 공부를 시작했다. 문제집 하나만 죽어라고 팠다. 지방 공연 때는 이동하는 버스에서 풀고, 숙소에서도 풀었다. 1년간 공부해서 당당히 붙었다. 10년 후에는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김 감독은 취임하자마자 단원 38명을 일일이 불러 면담에 들어갔다. "단원 개개인은 소박하고 착한 사람인데, 조직의 오해와 불통이 깊은 것 같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취임 인터뷰에 갈등을 말하긴 쉽지 않죠. 하지만 문제를 무조건 덮기만 하는 건 제가 가고자 하는 길에 역행됩니다. 이 시대 가장 독창적이고 정체성 있는 창극은 어떤 것인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그래도 꿈은 배우로 남는 것"이라며 "내년에는 좋은 작품 한 두편 정도는 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