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은은… 훔치고 싶은 목관 파트

  • 김성현 기자

입력 : 2012.02.23 23:44

[공연리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멘델스존 연주한 재닌 얀센, 안전한 레퍼토리 선택 아쉬워

"우리는 록 스타가 아니라 120여 명의 실내악 앙상블처럼 연주한다."

지난 21일 네덜란드 최고의 명문악단인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 앞서 기자 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악단의 성공 비결에 대한 취재진의 질문이 쏟아지자, 얀 라스 행정감독은 미소 지으며 이렇게 답했다. 이 말이 현실로 드러나기까지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같은 날 저녁 예술의전당에서 이 악단의 지휘봉을 잡은 정명훈은 흰색 나비 넥타이와 검은 연미복으로 악단에 무언(無言)의 경의를 표했다. 네덜란드는 인구 1600만명에 불과하지만, 이 악단은 2008년 클래식 음악 전문지인 '그라모폰'의 평가에서도 베를린 필과 빈 필을 제치고 세계 1위에 오를 만큼 강한 저력을 지니고 있다.

첫 곡인 헝가리 작곡가 코다이의 '갈란타의 춤'에서 클라리넷 수석이 연방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면서도 매혹적인 주문 같은 독주를 쏟아내자, 제1바이올린과 첼로가 든든하게 받쳐줬고 이들의 트레이드마크인 풍성한 앙상블은 마치 물결처럼 번졌다. 또다시 이어지는 피콜로와 플루트까지. 만약 이 악단에서 훔쳐오고 싶은 파트를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단연 목관을 꼽고 싶을 정도였다. 올스타 군단으로 구성된 베를린 필의 목관이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에 가깝다면, 이들의 목관은 속으로 깊이 감춰진 은은함이라는 점이 차이였다.

2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서 지휘봉을 잡은 정명훈이 관객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현대카드 제공
19세에 이 악단과 처음 협연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34)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골랐다. 비발디와 바흐부터 벤저민 브리튼의 20세기 협주곡까지 폭넓은 레퍼토리에서 탄탄한 기본기를 자랑하는 얀센의 매력을 온전히 드러내기보다는 절반쯤만 보여줬다는 점에서, 안전 위주의 레퍼토리 선택은 다소 아쉬웠다. 하지만 3악장 도입부에서 바이올린 독주에 목관의 윤기와 첼로의 중저음이 어울리자, 그저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협주곡이 아니라 풍성한 질감을 지닌 관현악 작품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날 후반부의 연주곡이었던 헝가리 작곡가 바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은 전체 악단이 독주자인 동시에 협연자가 된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이를테면 악단 전체가 집단 공격과 집단 수비를 동시에 하는 '토털 사커' 같은 곡이다.

작품 속의 거친 야성을 조금 더 확연하게 드러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았지만, 자로 잰 듯 정확한 앙상블과 고급 융단처럼 격조 있는 음색(音色)으로 이들은 한바탕 화려한 관현악 축제를 벌였다. 오케스트라의 사운드가 전반적으로 직선형이라기보다는 곡선형에 가깝고, 한꺼풀 벗겨 내도 여전히 다음이 남아 있어 무한한 깊이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마치 양파껍질 같은 악단이기도 했다. 정명훈이 단골 앙코르인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을 시작하려 힘차게 지휘봉을 쳐들자, 악단의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목관은 또다시 빛나는 윤기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