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뮤지컬 '위키드', 그 환상과 마법의 맥박

  • 싱가포르=신정선 기자

입력 : 2012.02.08 23:30

싱가포르 공연을 가다 - 마법도시, 왕따소녀의 영혼 관객은 꿈과 환상에 푹 젖어… 5월 그 팀 그대로 내한 공연

금발 소녀는 진주빛 정장에 산더미 같은 짐가방을 대동하고 학교에 나타난다. 흑발 소녀는 거무튀튀한 일상복에 해진 가방을 들었다. 사방에 친구로 둘러싸인 금발 소녀는 웃느라 정신없는데, 외톨이 흑발 소녀는 수심이 가득하다. 그녀의 얼굴은 괴상하고도 불길한 녹색. 누구도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는다. 이보다 다를 수 없는 두 소녀가 어쩌다 기숙사의 한 방을 쓰게 되면서, 세기의 뮤지컬은 초록빛 환상의 문을 연다.

브로드웨이 흥행의 절대 반지를 낀 뮤지컬 '위키드(Wicked)'가 오는 5월 한국을 찾는다. '오페라의 유령 이후 최고'라는 작품의 위용을 지난 7일 싱가포르에서 미리 엿봤다. '21세기 건축의 기적'으로 불리는 마리나베이샌즈 내 그랜드시어터에서 지난해 12월 개막한 '위키드'는 유료 좌석점유율 90%를 기록하며 인기를 과시하고 있다. 평일임에도 2100석은 대여섯살 여자 아이부터 중년 남성까지 다양한 관객으로 가득 찼다. 작품은 무대 상단에 자리한 6m 길이 용의 용트림으로 시작됐다. 소형 비행기만 한 용이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연기를 뿜자, 마법의 도시 에메랄드시티의 지도가 그려진 커다란 막이 올라갔다.

이야기는 나쁜 마녀로 오해받게 된 왕따 엘파바와 착한 마녀가 된 인기 만점 글린다의 우정을 기둥으로 흘러간다. 에메랄드시티의 초록빛은 동경의 대상이지만, 엘파바의 피부색이 됐을 때는 멸시와 배척의 상징이 된다. 오해를 풀게 된 글린다가 머리에 꽂았던 분홍꽃을 엘파바에게 꽂아줄 때 두 사람은 하나로 이어진다.

'오즈의 마법사'를 뒤튼 이야기라고 하지만, '오즈' 이야기를 전혀 몰라도 즐길 수 있다. 바탕이 된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소설에서는 골격만 가져왔다. 악의 본질에 대해 파고든 원작과 달리, 마녀이기 전에 소녀였던 한 영혼을 들여다보는 데 초점을 맞춰 훨씬 쉽게 전달된다. 관객이 극장에서 꾸고 싶은 꿈과 환상의 맥박을 정확히 짚어 낼 줄 아는 브로드웨이 제작진의 노련함이 살아있다.

나쁜 마녀로 오해받는 엘파바(왼쪽)가 착한마녀 글린다와 나누는 우정은 두 영혼의 교감이라는 점에서 세대를 넘어 깊은 감동을 준다. /설앤컴퍼니 제공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엘파바 역의 젬마 릭스다. 목에 성대 대신 강철 빔을 심어놓은 듯한 그녀가 '중력에 맞설 거야(Defying Gravity)'를 부르며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세상의 편견을 무찌른 외톨이 소녀의 환호가 수천명의 심장을 쾌감의 아드레날린으로 고동치게 한다. '중력…'을 비롯한 '위키드' 노래들은 극장을 나선 후에도 오랫동안 귓가에 맴돈다. 호소력이 강한 '위키드' 노래의 힘은 오프라 윈프리가 지난해 '오프라 윈프리 쇼' 마지막 방송에서 2막의 '영원히(For Good)'를 청해 들으며 눈물을 쏟은 사실에서도 재확인된다.

소녀의 우정을 묘사하고 있으나, 여성용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섣부르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43) 순천향대 교수는 "2003년 처음 위키드를 봤을 때 남성인 나도 눈물이 났다"며 "국내 창작 뮤지컬 중에는 인물의 관계를 쌓아가는 힘이 약한 것이 많은데, 위키드는 차근차근 감정을 쌓아올려 감동을 주는 것이 장점"이라고 평가했다.

'위키드'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두 소녀가 "네가 있었기에 내 삶은 나아졌어"라고 노래하며 여운을 남긴다. 삶에 단 한 번, 그런 존재를 가져봤다는 축복에 감사하며 둘은 다시 보지 못할 이별 앞에서도 웃을 수 있다.

5월 31일 개막할 내한 공연에는 싱가포르에서 공연 중인 투어팀이 들어온다. 공동 제작을 맡은 설앤컴퍼니의 설도윤 대표는 "브로드웨이 현지의 작품 그대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연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열리며, 첫 티켓 판매는 28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