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1.26 03:08 | 수정 : 2012.01.26 06:10
[피아니스트 서혜경, 음반 발표]
암도 극복한 '불굴의 여인'… 드미트리예프 지휘봉 아래서 솔로 발레리나처럼 건반 누벼
햄버거로 끼니 때워가며 연주, 망치질하던 인부들도 넋 놓아 "의미있는 기록, 목이 멘다"
"땅! 땅! 땅!" 작년 9월 7일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172년 된 콘서트홀. 인부 예닐곱명이 홀 바깥의 낡은 계단을 망치로 내려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피아니스트 서혜경(52)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녹음을 끝내려면 연주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 그녀의 손가락이 솔로 발레리나처럼 건반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작업복 차림 인부들이 홀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일손을 놓고 그들은 1시간 넘게 객석에 앉아 동양에서 온 여성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에 빠져들었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1~3번)과 '협주적 환상곡'을 녹음한 음반이 26일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다. "연주는 순간의 예술, 녹음은 영원의 예술"이라는 서혜경은 "천신만고 끝에 망망대해를 건넜는데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다시 앞을 가로막는 것처럼 아득하고 헉헉댄 시간이었다. 하지만 피아니스트로서 의미 있는 소리 기록을 남겼다는 사실에 목이 멘다"고 고백했다.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곡 녹음은 여성 피아니스트 최초. 2010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까지 더하면 '최초' 발자국은 한층 뚜렷해진다. 차이콥스키의 제자인 알렉산더 질로티가 개작(改作)하기 전인 1874년 원본 악보를 구해서 연주해 희소성까지 더했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전집은 1964년 부조니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마이클 폰티(75) 정도가 손에 꼽힌다.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차이콥스키 협주곡 전곡은 녹음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피아노학회를 창설하고 이화여대 음대학장을 지낸 장혜원(73)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은 "라흐마니노프와 차이콥스키는 음역이 넓고 난해해 건반 전체를 아우르는 기교가 필요하고, 솥뚜껑 같은 손에 풍부한 감정을 실어 탄력 있는 음형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연주자 본인의 의지와 음반사의 요청이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에 서혜경 같은 성취를 이뤄낸 연주자가 드물다"고 설명했다.
서혜경은 2006년 가을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여덟 번의 항암치료와 절제수술, 서른세 번의 방사선 치료를 이겨낸 '불굴의 여인'이다. 그러나 쉬는 날 없이 계속된 녹음은 "딸이 챙겨준 비타민과 오메가3, 색색깔의 알약이 없으면 뻗어버리고 말" 고난의 연속이었다. 끼니는 거의 대부분 햄버거와 콜라로 때웠다. 오케스트라 대여 비용만 1500만원에 달해 추가 비용을 안 내려면 정해진 시간 안에 녹음을 끝내야 했기 때문. 같은 곡을 10여회 반복하는 건 필수였다. "프로듀서에게 좋은 음원을 충분히 줘야 최상의 편집을 뽑아낼 수 있어서"였다.
서혜경의 등 뒤에서 녹음을 함께한 겐첼트 블라디미르(제1바이올린 악장)는 "음악과 음악이 허공에서 매듭으로 묶이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며 "특히 그녀가 녹음한 '협주적 환상곡'은 '러시아 음악의 5인방'을 낳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도 연주가 잘 안 되는 어렵고 귀한 곡"이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