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보다 러시아가 좋은 이유? 배부르면 예술이 안 나와서…"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2.01.13 23:35

'러시아 최초 동양인 지휘자' 노태철 내한 연주회

"1994년 헝가리 하이든 챔버 오케스트라에 갔을 때 단원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동양인이라 깔보는구나' 기분 나빴지요. 이젠 압니다, 무시한 게 아니라 내가 실력이 없어 보였다는 걸."

지휘자 노태철(50)이다.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다음 달 4일 예술의전당) 객원지휘를 맡아 한국에 온 그는 "지휘자는 첫 연주를 듣고 뭐가 부족한지 즉석에서 딱딱 짚어줘야 단원들 자세가 바로 잡힌다"면서 "지금은 누워 있든 껌을 씹든 신경 안 쓴다, 실력으로 그들을 통솔할 자신감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13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지휘자 노태철은“가장 러시아다운 색채를 보여주는 한국인 지휘자가 되겠다”고 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동아대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뷔르츠부르크 국립 음대에서 유학한 노태철은 1997년 동양인 최초로 비엔나 왈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발탁되며 눈길을 끌었다.

1994년 독일 호프 심포니커 지휘를 시작으로 18년간 헝가리안 심포니·토론토 필하모니·서울시향 등 세계 80여 오케스트라와 140여 콘서트홀에서 400회 이상 공연을 펼쳤고, 세계 60여명의 작곡가와 오케스트라·솔리스트가 참여하는 러시아 '고리키 현대음악 축제'에서 예술총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5년 타타르스탄 국립 오케스트라의 수석객원지휘자가 되면서 '러시아 최초의 동양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수식어를 보탰다.

언어도 생김새도 다른 타타르스탄 단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만의 필살기는 단 하나, '동행(同行)'이다. "섞여서 먹고 자는 건 당연하고요, 단원들이랑 벌거벗고 목욕도 같이 했어요. 지휘봉을 놓는 순간 친구가 되는 겁니다."

러시아와 동유럽 무대를 선호하는 까닭은 "배부르면 예술이 안 나와서". 2000년대 초반 미국 LA에서 3년간 살며 회당 지휘료를 5000달러씩 받았지만 도로 으로 돌아갔다.

"어느 순간 허전했어요. 러시아나 동유럽의 지휘료는 미국의 절반이 안 됐지만 행복했어요. 음악가라고 얘기하면 집주인이 집세도 시세보다 덜 받고, 은행은 보증이 없어도 거금(800만원)을 선뜻 빌려줬습니다."

폭발하듯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가 특징인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협연 에프게니 브라흐만)과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으로 이번 내한무대를 채운다.

노태철은 "기차를 타고 1000㎞를 가도 눈밖에 없는 나라의 아련한 고독을 싣겠다"고 했다. "땅덩이만 우리의 170배인 러시아는 가난과 눈, 추위로 압축되는 나라입니다. 죽은 자식을 끌어안고 자장가를 부르는 미친 여인의 한이 곡마다 스며 있지요. 한겨울 볼가강 주변을 산책하면서 라흐마니노프를 듣는데 다라라~ 다라라~ 선율이 흐느끼고 있었어요. 가슴이 아파 더 들을 수 없었던 그 곡을 러시아 정통 악단과 제대로 연주해 보이겠습니다."


▲모스크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 내한공연=2월 4일 오후 7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