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2.01.11 01:01
미국 뉴욕 맨해튼의 '차임 & 리드' 갤러리에서 지난 7일부터 이틀간 열린 그림 판매전 '변두리에서 온 엽서(Postcards from the Edge)'는 작가 이름에 대한 맹목에 빠진 미술계를 조롱하는 이름표 없는 '블라인드 전시'다. 14년 전 238명의 작가로 시작된 이 전시는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소문이 퍼지면서 올해는 1400명이 넘는 작가가 참가하는 대형 행사로 발전했다.
7일 오전 찾은 '차임 & 리드' 갤러리의 흰 벽엔 그림 1400여점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똑같은 엽서 크기의 그림들은 프레임도 없이 바둑판 모양으로 빼곡히 벽을 채운다. 그림에 붙은 꼬리표는 작은 스티커에 적힌 빨간 번호가 전부다. 미술관 입구와 가장 가까운 쪽의 그림이 1번이고 벽을 따라 숫자가 점점 올라간다. 번호는 이 전시를 기획한 에이즈(AIDS) 예술가 후원 단체 '비주얼 에이즈' 사무실에 작품이 도착한 순서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미술관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은 똑같은 사이즈의 그림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혹시라도 '대박'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들뜬 모습이다. 가격은 모두 85달러, 균일가다.
주최 측은 전시에 참가한 작가 명단을 인터넷에 미리 공지한다. 이날 전시된 그림 중엔 쿤스를 비롯해 존 발데사리, 키키 스미스, 에드 루샤 등 작품 값 비싸기로 유명한 현대미술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부인이자 예술가인 오노 요코는 매년 짧은 문장 하나를 적은 간단한 작품을 출품하기로 유명하다. 한편 뉴욕 일대의 미술 전공 대학생들이 보내온 습작 수준의 그림들도 적지 않다. 4년째 이 전시를 찾고 있다는 노무라연구소 한상훈 부사장은 'Expect Delays(늦을 것 같다)'라고만 쓰인 작품 앞에서 "오노 요코 풍이 맞지만, 비슷한 방식으로 문장 하나를 적어놓은 작품이 이 외에도 여럿 있어 확신할 수는 없다. 대가의 스케치인지 대학생의 습작인지… 이름을 가리면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작가 이름은 결제가 끝난 후 구매자에게 제공되는 봉투를 열어보면 알 수 있다. 미술애호가라는 애나 빌레이씨는 흰 종이에 연필로 동그라미 여러 개를 그려 넣은 그림을 골랐다면서 "나는 이 작품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영영 작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을 생각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