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틀(베를린필 지휘자)과 점심 한 끼, 값을 매길 수 없는…

  • 김경은 기자

입력 : 2011.11.17 03:06 | 수정 : 2011.11.17 09:27

형제로 이어지는 '손열음 사랑' - 故 박성용 명예회장은 로린 마젤에 소개하고
동생 박삼구 회장은 래틀과 만남 주선해… "악기보다 값진 선물"

"이 피아니스트가 저희 재단이 후원하고 있는 손열음입니다. 열음이가 국제 무대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래틀 경(卿)이 도와주십시오."(박삼구)

"오! 물론입니다. 실력 있는 연주자는 그 씨앗을 전 세계에 퍼뜨려야 하죠. 제가 꼭 도와주겠습니다."(래틀)

16일 낮 서울 JW메리어트호텔 중식당에서는 아주 특별한 점심식사가 펼쳐졌다. 주인공은 베를린필의 지휘자 겸 예술감독인 사이먼 래틀(Rattle·56)과 차이콥스키 콩쿠르 2위에 빛나는 피아니스트 손열음(25).


15일에 이어 이날 저녁 이틀째 내한공연을 앞둔 래틀과 손열음의 점심 만남은 박삼구(66)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마련했다.

손열음과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인연은 박 이사장의 형인 고(故) 박성용 명예회장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명예회장은 '기업가 패트론'(patron·후원자)이었다. 아흔이 넘은 노모(老母)의 손을 잡고 대학로 소극장을 찾아가 공연을 보던 예술애호가였고, 2003년에는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 회장을 맡아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과 협력에 힘썼다.

차세대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21세기 카라얀' 래틀과의 점심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16일 점심을 함께한 김영욱 학장·손열음·사이먼 래틀·박삼구 회장·첼리스트 정명화(왼쪽부터). /금호아시아나그룹 제공

손열음은 12살에 재단의 영재 프로그램을 통해 데뷔했고, 지금까지도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어린 손열음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박 명예회장은 자기 집무실에 있던 오스트리아 명품 피아노(뵈젠도르퍼)를 손열음에게 선물했었다.

손열음에게 '거장 소개'는 어쩌면 악기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2003년 봄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던 로린 마젤에게 손열음을 소개하기 위해 만찬을 열었고, 마젤은 이듬해 뉴욕필 내한공연 때 손열음을 협연자로 지목했다. 패트론이 발로 뛰어 성사시킨 결과였다.

그랬던 박 명예회장이 2005년 타계한 후 음악계는 그 공백을 누가 메울지 걱정했다. 그러나 박삼구 회장은 취임 당시 "더도 덜도 말고 형님(박성용)만큼만 하겠다"고 다짐했고, 그렇게 하고 있다. 지난 2008년 평양 공연을 마치고 서울 공연에 온 뉴욕필이 다시 손열음과 협연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이번에는 래틀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 이 자리에는 래틀과 친분이 두터운 첼리스트 정명화, 김영욱 서울대 음대학장뿐만 아니라 베를린필의 호른 수석 스탠리 도르(Dohr), 세계적 매니지먼트사인 아스코나스 홀트의 마틴 켐벨―화이트(Campbell―White) 사장도 함께해 손열음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이날 손열음은 반 클라이번 콩쿠르 때 연주했던 곡을 녹음한 CD 한 장을 래틀에게 선물했다. CD를 유심히 살펴보며 "선곡을 정말 잘했다"고 칭찬하던 래틀은 "현대음악 작품을 얼마나 연주해 봤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현대곡을 좋아해서 10살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래틀은 환하게 웃으며 "아주 좋은 자세다. 음악가가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면 현대음악을 자주, 그리고 잘 연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점심 한 끼

정명화씨는 "오늘 식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젊은 연주자는 유명 악단 및 지휘자와 좋은 연주를 하면 커리어를 금방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박 회장님은 오늘 열음이의 앞날에 날개를 달아준 거나 마찬가지예요." 정씨는 "열음이가 어른들과 같이 밥을 먹어서 최대한 말을 아꼈지만 평소 책을 많이 읽고 말도 조리있게 하는 연주자라서 질문을 받으면 또박또박 대답을 잘 하고 성숙된 모습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손열음이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필과 협연하는 모습을 언젠간 볼 수 있을까. 거장과의 만남 이후 손열음에게는 목표 하나가 더 생겼다.


☞패트론(patron)


예술가를 경제적·사회적으로 뒤에서 도와주는 후원자를 뜻한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家), 프랑스의 퐁파두르 부인 등이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