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석희곡상] '두 번 걸음 말라' 대사가 계시처럼… 두 번 안쓰려 한달음에 썼죠

  • 신정선 기자

입력 : 2011.11.16 23:58

[제5회 차범석희곡상 '잔치' 극작가 김수미]
"인생의 답 찾으려 글 썼는데 지금은 답을 찾는 과정이 글 쓰는 이유가 됐어요"

차범석희곡상 트로피. 조각가 최만린의 작품이다.

올해로 5회째를 맡은 차범석희곡상은 지난 8월 31일 공모를 마감한 결과 장막희곡 부문 82편, 뮤지컬 극본 부문에 50편이 접수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응모작이 꾸준히 늘고 있으며, 이름난 기성 작가의 응모도 적지 않았다. 희곡 심사는 연출가 임영웅·극작가 윤대성·김윤철 교수가 맡아 김수미의 ‘잔치’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연극평론가 유민영·윤호진 에이콤 대표·박명성 신시뮤지컬 대표가 심사를 맡은 뮤지컬 극본에서는 당선작이 없었다.


한 줄의 대사가 날아와 꽂혔다. "두 번 걸음 말라." 계시처럼 떠오른 그 한 마디를 붙들고 한달음에 극의 뼈대를 완성했다. "극 중에서 어머니가 준비한 잔치가 축제이자 제의(祭儀)라는 양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사였어요. 그 한 줄이 이렇게 귀한 상을 제게 안겨줬네요." 지난 10일 만난 극작가 김수미(41)는 당선작 '잔치'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며 "버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치 있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는 간절함과 자존심으로 쉬지 않고 썼어요.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밤늦게 받았는데, 상을 받으면 마냥 좋기만 하던 초년 작가 때와는 확연히 느낌이 다르더군요. 희곡 작가로 살아가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 더 열심히 버티라는 뜻으로 주시는 상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제가 받은 격려를 동료와 후배에게 나눠줄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합니다."

김수미는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부러진 날개로 날다'로 당선되며 세상에 나왔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5년간 투병하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때 쓴 작품이다. 그는 당시 수상 소감에 "쓰지 않으면 갑갑함으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 쓴다"고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가 선물로 주고 가신 상이라고들 했어요. 그 말이, 그 현실이 얼마나 싫었는지 몰라요."

그럼에도 그는 "작가는 인생을 팔아먹는 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잔치' 중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된장 없는 된장찌개를 끓이는 장면과 5·18 당시 사망한 셋째 아들 이야기도 지인의 경험에서 빌려왔다.

그는 상복이 꽤 있는 작가다. 제1회 옥랑희곡상(1999), 제1회 동랑희곡상(2008) 등 여러 상을 받았다. 차범석희곡상에는 2007년 첫해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도전했다. 낙선의 경험이 쓰고 떫었는데도 계속 도전한 것은 "차범석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극작가로서 꼭 받고 싶었어요. 이번에 떨어졌더라도 될 때까지 계속 응모했을 거예요. 차범석 선생님께서 끝까지 놓지 않으셨던 인간이라는 화두가 작가가 가져가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릴 때 배우가 꿈이었던 그는 방송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영화 '청담보살'(감독 김진영·2009년)의 시나리오도 그의 작품. 그래도 가장 창작욕을 끓게 하는 것은 관객과 살아있는 소통을 나누는 무대이고 희곡이다. "무대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서는 곳이고 아무나 밟지 못하는 땅이죠. 그 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등단할 무렵만 해도 모든 무대에서 5·18을 말했는데, 지금은 경제와 취업 이야기를 하죠. 세상이 고달프고 예술은 힘들다는 점은 여전하고요. 이럴 때 우리가 무엇을 지켜내야 할지를 한 번 더 생각하고 물어보게 하는 것이 글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

제5회 차범석희곡상 희곡 부문 당선자 김수미씨는“희곡작가로서 버틸 수 있는 힘을 얻게 돼 감사한다”며“철학하는 희열을 알려주는 작품을 쓰겠다”고 말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그는 자신을 "행복할 수 있다고 위로하는 작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보기에 불편하고 때로는 여러 감정이 충돌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작품을 쓰는 것이 목표다. 평소 읽는 신문의 사회면이 세상을 보는 창이 된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서 썼는데 지금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됐어요. 예술은 손으로 물을 뜨는 것 같아서, 손은 젖었는데 손안에는 물이 없죠.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다시 물을 떠야 하듯, 글을 향한 가시지 않을 갈증 때문에 앞으로도 쓰는 걸 멈추지 못할 것 같아요."

그의 작품 '녹색태양'(2006년 거창국제연극제 희곡 부문 우수상)이 내달 1일 개막한다. 도시인에게 필수적인 소통의 공간이 된 커피점에서 A부터 Z까지 익명의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어떻게 대화를 소비하고 삶을 소비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관객에게 철학 하는 희열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야기를 파는 시대가 아니라 철학을 파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당선작 '잔치'는… 老母가 준비한 잔치는 잔치가 아니었고…


이른 봄 부산 바닷가 마을, 일흔 노모(老母)는 잔치 준비에 여념이 없다. 치매 초기인 노모는 중풍으로 몸져누운 남편을 돌본다.

부부는 4남매를 낳아 기르다 1980년 5월 민주화 소용돌이에 셋째 아들을 잃었다. 시의원이 된 장남은 정치판에서, 연극 연출가인 막내아들은 무대에서 시대의 정의를 찾고 있다.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났던 딸은 남몰래 이혼했다.

어머니의 부름으로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셋째의 죽음 이후 엇갈려 흘러온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마침내 서로의 고통을 내려놓고 위로의 향연이 시작되려는 순간, 노모가 준비한 잔치의 참담한 진실이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