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하나, 찍는데 두 달

  • 곽아람 기자

입력 : 2011.11.14 23:23

백남준 이후 첫 구겐하임 회고전 연 이우환, 국내 전시

이우환(75)의 그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캔버스 가운데 청회색 점 하나 찍은 것. 그러나 이우환은 이렇게 말한다. "캔버스 딱 한가운데에 점을 찍지 않는다. 약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비켜나 있다. 사람의 눈은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것을 중앙으로 갖다 놓으려 애를 쓴다. 그럴 때 긴장감과 움직임이 느껴진다." 선(禪)적이고 명상적인 아름다움은 심리메커니즘을 연구한 결과다.

15일부터 내달 18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신관에서 개인전 '대화'를 여는 이우환은 "이번 전시회 출품작 11점이 모두 점 하나만 찍은 작품이다. 최소한이되 우주(宇宙)와 같은 최대한의 것을 연상시킬 수 있는 꼬투리로서 점 하나만을 남겼다"고 말했다.

일본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하는 이우환은 쉽게 말해 세계적으로 이름이 통용되는 대표적 한국화가다. 지난 6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백남준 이후 첫 한국작가로 회고전을 열었고, 지난 10년간 국내 경매에서 낙찰된 작품은 467억750만2150원으로 1위다.

이우환의 작품을 보고 관객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나도 그릴 수 있겠다'. 그러나 누구도 그만의 '아우라'를 완벽하게 재현하지는 못한다. 무심한 듯 보이는 이우환의 점은 일필휘지의 산물이 아니라 치밀하게 계산된 노동집약적인 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선, 점 하나를 찍는 데만 40~50일이 걸린다. 수십 번 측량을 해서 점 찍을 위치를 정하면 붓질을 한다. 다음 붓질까지 열흘을 기다린다. 열흘은 '물감이 완전히 마르지는 않고 아직 꼬들꼬들해서 붓 자국을 살리기 좋은 상태'가 될 때까지의 시간. 몇 번씩 거듭해 자신만의 에너지(氣)를 응축시킨 결과가 '점 하나 찍힌 작품'이다. 점을 찍을 때도 모내기하는 농부처럼 90도로 허리를 꺾어 붓질한다. 그렇게 해야 "붓끝에 기운이 잘 모인다". 직업병인 허리 통증 때문에 늘 파스를 달고 살고, 한국에 올 때마다 침을 맞는다.

“몇십년을 그려도 내 작품을 남들이 보고 있으면 부끄럽다. 꼭 내가 발가벗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작품‘대화’와 함께한 이우환. 그는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한정을 짓는 것은 좋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모든 그림 재료는 그만의 "특수 레시피로 만든다"고 했다. 캔버스는 일본·유럽 공장에서 주문 제작하는데 벨기에산 삼베에 흰색 안료를 네 번 칠해 만든 것이다. "캔버스는 벽보다 더 튼튼하고, 더 암시적인 느낌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붓은 크기대로 인조 털로 만들어 쓰고, 물감은 몇 가지 돌가루와 유성 안료를 배합해 만든다. 돌가루를 쓰는 것은 독특한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돌'이 곧 '시간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 출품작의 주조를 이루는 청회색은 푸른 계통의 검은색과 흰색을 배합해 그러데이션을 준 것. 이우환은 "푸른 계통의 검정은 개념적이고 차분하다. 예술이란 현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인데, 그 거리감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빛깔"이라고 했다.

이우환은 경남 함안 출신으로, 자라면서 "그림은 사내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다. 그는 "화가로서 자부심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콤플렉스"라고 털어놓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즐겁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단, 기왕 시작한 거, 열심히는 했다. 그걸 무기로 삼아 세계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그가 점 하나에, 선 하나에 그토록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콤플렉스의 극복과정인 듯했다.

이우환은 서울대 미대 1학년이던 1956년 도쿄의 작은아버지를 방문하러 갔다가 일본에 눌러앉았다. 니혼대 철학과에 편입했지만 결국 그림으로 돌아왔다. "아까 거리를 걷는데, 은행나무 잎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오더니 내 앞에 뚝 떨어졌어요. 아직도 그 은행잎이 그린 포물선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드문 일이죠. 예술이란 그런 거예요. 늘 있는 일을 일부러 눈에 띄도록, 스쳐 지나갈 수 없도록 만드는 거. 내 그림이 사람들 머릿속에 그 은행잎만큼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까…. 난 자신이 없어요." (02)2287-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