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르비가 말했다 "백건우는 大家, 두말하면 잔소리"

  • 파리=김성현 특파원

입력 : 2011.11.03 03:10 | 수정 : 2011.11.03 14:49

[파리 오케스트라 내달 내한] 파보 예르비가 지휘, 백건우와 라벨曲 협연

'모든 성인(聖人)을 기린다'는 뜻의 휴일인 만성절(萬聖節)이었던 지난 1일에도 프랑스파리 오케스트라는 오전 리허설을 거르지 않았다. 이들이 상주하는 공연장인 살 플레옐의 복도에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가 서 있었다. 이들을 맞으러 짙은 청바지와 검은 셔츠 차림의 지휘자가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왔다.

윤정희씨에게 두 볼을 맞대는 프랑스식 인사를 보낸 지휘자는 지난해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한 파보 예르비(Paavo J�qrvi)였다.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에 이어 파리까지 입성한 '신세기의 음악 황제'는 다음 달 2~3일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내한 공연을 갖는다.

인터뷰 도중에도 두 거장은 틈만 나면 작품의 해석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첼로가 연주하는 대목의 박자를 조금 늦춰서 여유를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자, 지휘자 파보 예르비는 곧바로 선율을 흥얼거리며 즉석에서 리허설을 가졌다. /김성현 특파원

이들은 지난 2006년 2월 파리에서 바르토크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하면서 처음 만났다. 당시 지휘자는 작곡가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제안했지만, 백건우는 거꾸로 난곡(難曲)으로 꼽히는 협주곡 2번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백건우는 "당시 오케스트라에서 같은 곡을 수차례 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의 관객을 위해서라도 바꾸는 편이 옳다고 여겼다. 연주자는 언제 어디서든 새로운 협주곡에 도전할 수 있도록 항상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르비는 "너무나 까다로운 곡을 비범하게 해석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음악 감독에 취임하고서도 예르비는 한국 공연의 동반자로 어김없이 백건우를 초대했다.

백건우에게 파리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지난 1999년 이후 4번째가 된다. 다음 달 내한 공연에서 그는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G장조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골랐다. 백건우는 "프랑스 오케스트라와 프랑스 작곡가를 국내에 소개한다는 점에 가슴 설렌다"고 했다. 내한 무대에서 그가 고전적 품격을 갖춘 낭만주의 협주곡의 걸작으로 꼽히는 슈만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예르비는 지난해 파리 오케스트라에 취임한 이후, 자신의 음악적 '고향'인 북유럽 음악과 함께 '새로운 둥지'가 된 프랑스 음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휘자와 악단의 조합이 빚어낸 첫 결과물도 프랑스 작곡가 비제의 관현악 음반이다. 예르비는 "프랑스 오케스트라는 통일된 소리 속에서도 고유한 개성을 언제나 잃지 않는다. 때로는 성냥을 붙이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운 열정을 쏟아낸다"고 말했다. 독일과 북유럽 음악뿐 아니라 드뷔시와 라벨, 비제와 메시앙, 생상스와 포레 등 프랑스 음악을 프로그램에 전면 배치하고 있는그는 "모험을 감수하는 것도 음악 생활의 일부"라고 말했다.

예르비에게는 지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내한 공연이다. 그가 한국 관객에 대해 "미래의 주역인 젊은 청중의 층이 두텁고, 자신의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낼 줄 안다는 점에 무척 놀랐다"고 말하자, 백건우는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줄곧 한발 뒤에서 남편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영화배우 윤정희는 인터뷰가 끝나자 자신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시(詩)'의 영상물을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지휘자 예르비에게 건넸다. 마지막으로 지휘자에게 백건우의 피아노에 대한 의견을 묻자,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두 말이 필요 없다. 백건우는 '위대한 대가(大家)'다."

▶파리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지휘 예르비, 피아노 백건우)=12월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