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 파비오 비온디 & 에우로파 갈란테

  • 성남아트센터 월간 '아트뷰'
  • 글=이준형(음악 칼럼니스트)

입력 : 2011.09.29 13:25 | 수정 : 2011.09.30 14:08

우리 시대의 수퍼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 파비오 비온디, 그리고 그가 이끄는 이탈리아 바로크 앙상블의 대명사 에우로파 갈란테가 2004년과 2008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우리나라를 찾는다. 11월 6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번 무대에서는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와 함께 이미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벨기에, 헝가리 등지에서 큰 찬사를 받았던 ‘바로크 시대의 스리 테너’ 프로그램을 들려줄 예정이어서 한층 흥미로운 무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반에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비발디 '사계' 음반(Opus111)과 함께 혜성처럼 등장했던 곱슬머리 청년 파비오 비온디는 두 가지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고향으로서 코렐리, 타르티니, 비발디, 제미니아니, 로카텔리 같은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배출했던 이탈리아 악파의 적자嫡子라는 점이다.


이탈리아 악파는 근대 바이올린 연주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를 정점으로 카밀로 시보리Camillo Sivori와 안토니오 바치니Antonio Bazzini 이후 19세기 후반부터는 새롭게 등장한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악파에 밀리면서도 그래도 아리고 세라토Arrigo Serato, 조콘다 데 비토Gioconda de Vito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살바토레 아카르도Salvatore Accardo와 우토 우기Uto Ughi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 현대악기와 시대악기의 구분을 떠나 비온디는 아마도 줄리아노 카르미뇰라Giuliano Carmignola와 함께 이 유서 깊은 악파의 현재를 대표할 만한 연주자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는 지히스발트 카위컨과 야프 슈뢰더, 존 홀로웨이, 사이먼 스탠디지 등 플랑드르와 영국 연주자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바로크 바이올린 연주와 별로 관련도, 관심도 없었던 이탈리아 음악계에 새로운 흐름을 시작한 첫 번째 개척자라는 점이다. 비온디와 에우로파 갈란테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그들을 본받아 우후죽순처럼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와 시대악기 바로크 앙상블이 등장했으며, 이제 화려하고 격렬한 이른바 ‘이탈리아식 연주’는 세련되고 정교한 ‘영국식 연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확고한 흐름이자 거대한 유행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온디가 없었더라면 이 모든 것은 최소한 더 늦게, 그리고 어쩌면 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 20년, 비온디와 에우로파 갈란테는 탁월한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와 앙상블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해서 겨루고 있는 지금도 자신만의 세계와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그를 그저 파격적이거나 과장된 해석을 즐기는 연주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비온디는 결코 그런 진부한 수식어로 설명할 수 있는 연주자가 아니다. 그 민첩한 활과 빠르고 예리한 아티큘레이션, 언제나 청중의 의표를 찌르는 독창적인 해석은 여전히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어쩌면 비온디는 정격연주authentic performance라는 지독하게도 비역사적인 용어에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기 훨씬 전부터 그 위험성을 알아차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종종 그의 연주에서 매너리즘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파비오 비온디라는 연주자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거나 혹은 너무 음반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앞에 섰던 그의 연주에는 싱그러운 즉흥연주, 뉘앙스가 풍부한 섬세한 루바토,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한 독창적인 아티큘레이션과 다이내믹 조절, 음과 음 사이를 교묘하게 이어주는 농염한 포르타멘토, 때로는 재즈 연주 같은 느낌마저 주는 색다른 트릴, 속도와 압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활놀림, 콜레뇨col legno나 술 폰티첼로sul ponticello 같은 다채로운 음향 효과, 바이올린에 은박지를 구겨 넣어 악보가 지시한 색다른 음향을 내려는 실험 등 단지 바로크 바이올린 뿐만 아니라 현대 바이올린 연주자들에게도 강렬한 영감을 줄 수 있는 요소로 가득하다.


그는 다양한 도구와 미술 기법을 능숙하게 꺼내어 쓰는 위대한 화가처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며, 심지어 때때로 그림 속의 인물이 실제 모델과 별로 비슷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조차도 그 매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정념을 극대화하려고 했던 바로크 미학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아닐까?

이 모든 여정에서 에우로파 갈란테의 존재는 단지 ‘비온디의 악단’에 그치지 않는다. 에우로파 갈란테는 연주자 개개인의 자발성이 극도로 발휘된 자유로운 앙상블일 뿐만 아니라 비온디의 비르투오지티가 앙상블 차원으로 뻗어나간, 대단히 보기 힘든 단체이기 때문이다. 독주자로서 비온디와 견줄 만한 위상을 지닌 탁월한 첼리스트 마우리치오 나데오Maurizio Naddeo를 비롯해서 그 단원들의 역량과 앙상블의 완성도는 언제나 최상의 수준이다.


파비오 비온디와 에우로파 갈란테의 가장 빛나는 영역은 역시 비발디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음악일 것이다. 지금 들어도 여전히 신선한 첫 번째 <사계>와 한 지점에 머물지 않고 또 다시 도약한 두 번째 <사계>(Virgin), 날선 긴장감과 도발적이면서 무한히 자유로운 해석이 흘러넘치는 <레스트로 아르모니코> 전곡(Virgin),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리날도 알레사드리니와 파브리치오 치프리아니의 빛나는 연주를 들을 수 있는 현악 협주곡집(Opus111) 등은 비발디 연주-녹음사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넘치는 활력과 신선함이라는 측면에서 스테파노 몬타나리Stefano Montanari와 아카데미아 비잔티나Accademia Bizantina, 그리고 줄리아노 카르미뇰라와 마르카의 즐거운 음악가들Sonatori de la Gioiosa Marca 외에는 비교대상도 없는 명품들이다. 그런가 하면 2004년 내한 연주회에서 음반보다 더욱 진화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코렐리 합주 협주곡, 음악의 유희성을 극대화해서 기존의 고전주의적 면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강조했던 보케리니 실내악곡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비온디와 에우로파 갈란테의 음악세계는 이탈리아 바로크에 머물지 않으며, 레퍼터리 역시 생각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독일 음악 해석자로서의 비온디는 바흐 협주곡집(Virgin)에서 지중해 빛깔이 뚜렷한 독특한 연주로 바흐 음악의 이탈리아적 요소를 선명하게 드러냈으며, 우리가 아는 그 누구와도 닮지 않은 모차르트 협주곡을 선보이는가 하면 슈베르트, 슈만 음악의 내면적인 정념을 잡아내는 혜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기품이 넘치면서도 고혹적인 텔레만 트리오 소나타(Stradivarius)와 르클레르 바이올린 소나타(Arcana)는 또 어떤가.


한편 비온디는 최근 들어 지휘자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1994년에 발표했던 헨델 오페라 '포로Poro'만 해도 아직 미숙한 면이 엿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원숙미를 더해가더니 10년 후인 2004년에 만든 비발디 오페라 '바자제트 Bajazet'에서는 지휘자로서도 범상치 않은 장악력을 보여주었다. 또 최근에는 스타방게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바로크 음악 예술감독을 맡는 등 독자적인 지휘자 활동을 점점 더 늘리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연주회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비온디, 앙상블 연주자로서의 비온디, 그리고 지휘자로서의 비온디를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안 보스트리지 & 에우로파 갈란테 내한 공연
일시 11월 6일(일) 오후 5시
장소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문의 031-783-8000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