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깊어진 지성, 더욱 밝아진 서정 이안 보스트리지

  • 성남아트센터 월간 '아트뷰'
  • 글=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입력 : 2011.09.29 13:27

“20세기의 위대한 스리 테너인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 보다 성악적 가능성과 기질이 훨씬 더 다재다능 했던 3명의 18세기 테너들과 맞서는 작업은 경이로운 영감의 연속이었다. 그것은 때로 좁은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오페라 세계에서도 얼마나 다양하게 노래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 속 인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과업을 받은 단 한 명의 성악가에게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는 도전이었다.” - 이안 보스트리지, 2010년 '가디언'지에서

영국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가 한국 무대에 데뷔한 지도 어언 10년이 되었다. 10년 동안 변하는 건 강산뿐이 아닌가 보다. 첫 한국 방문 당시 그는 무대 뒤에서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며 안절부절 했더랬다. 집에 두고 온 갓 돌이 지난 아기가 언제 아빠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결국 TV 프로그램 촬영 중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고 그때까지 낯선 환경에 다소 경직되어 있던 보스트리지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아들이 아빠가 보고 싶다네요.”


10년이 지나 열한 살과 아홉 살 두 자녀의 아버지가 된 보스트리지는 투어를 마치고 가진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 맙소사. 그때는 제가 그랬지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나요.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의 공연이 심지어 심정적으로 더 느긋하고 편안할 때도 있어요.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할 시간이 부족하거든요.”

변한 것은 다만 가장으로서의 정체성뿐만이 아니다. 매번 한국을 올 때마다 보스트리지가 우리에게 선사한 노래는 슈베르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 가곡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헨델을 위시한 18세기 오페라 아리아들을 가져올 예정이다. 정적인 낭만주의 가곡과 다이내믹한 바로크 오페라 아리아. 부르는 방식에 있어서나, 시대적으로나 상당히 큰 격차가 존재하는 듯 보인다.


“꼭 그렇진 않아요. 넓은 관점에서 보면 낭만주의와 바로크는 음악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낭만주의를 공부하며 알아두었던 지식이 바로크 음악을 노래하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또 그 반대 경우도 있죠. 개인적으로도 실제로 성악가가 된 이후 바로크 음악을 한 번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가곡과 병행해 왔지요.”


확실히 그의 레코딩 기록을 보면 초창기에 '위대한 헨델'이라는 제목으로 헨델의 오페라 아리아를 노래한 음반을 녹음한 적이 있긴 하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보기 힘들었지만 유럽 무대에서는 헨델 오페라 무대에서 열연하기도 했다. 헨델에 대한 보스트리지의 사랑은 분명 각별하다. 그러나 이번 내한 무대는 그 이상의 독특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프로그램은 헨델을 넘어서 비발디와 보이스, 그리고 스카를라티까지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시대 악기 연주자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가 동행한다. 비발디의 '사계'라는 가장 보편적인 레퍼토리를 가장 파격적으로 연주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이 악단은 바로크 오페라를 발굴하는 선두주자로 유명하다. 보스트리지와 비온디라는 이번 이색적인 조합은 그저 단순한 우연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한 8년 전 쯤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비온디가 제게 아니발레 파브리Annibale Fabri라는 가수에 대해 가르쳐준 적이 있어요. 비발디의 오페라에서 특히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던 성악가였죠. 그때 처음으로 작곡가를 넘어서 그 당시 오페라를 불렀던 성악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화는 거기서 그쳤고, 비온디는 비온디대로 저는 저대로 음악을 연구하고 음반을 녹음했어요. 각자의 길을 한참 걷고 난 다음에 만난 탓인지 이번 협연이 더욱 반갑더라고요. 파브리에 이어 헨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영국 성악가 비어드가 눈에 들어왔고, 그리고 헨델의 오페라 '타메를라노'에서 실력을 발휘했던 테너 보로시니를 발굴했죠. 비어드가 불렀던 노래 중 보이스의 '솔로몬'에 나오는 '남풍아 부드럽게 불어라Softly Rise, o Southern breeze!'라는 곡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이번 프로그램 중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곡이기도 하죠.”

보스트리지는 11월 6일 오후 5시, 파비오 비온디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와 함께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공연에 앞서 그는 이미 이 프로그램들을 추려서 'Three Baroque Tenors'(EMI)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녹음한 바 있다. 흔히 언급되는 파바로티-도밍고-카레라스 조합의 스리 테너 대신 18세기 원조 바로크 테너들의 집합인 셈이다. 그러나 세 명의 성악가의 개성을 혼자서 모두 소화하기란 어렵지 않았을까. 음반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는 예상외로 매우 일관되게 지극히 보스트리지답다. 다만 가곡을 부를 때면 느껴지는 학구적인 진지함 대신 훨신 아름답고 밝은 서정미가 넘실거리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당연합니다. 세 명의 테너를 단지 흉내내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었으니까요. 가수들이 영향을 주었을지언정 그 작품의 독창성은 온전히 작곡가의 것이고, 저는 또 한 명의 성악가로서 그 작품들에 저를 투영해야만 하죠. 비발디라든가 스카를라티의 경우 자신의 가수들의 개성을 작품에 반영한 기색이 분명 있긴 합니다. 그러나 헨델은 상당히 줏대가 센 작곡가였죠. 아무리 당대 유명한 성악가가 노래를 부른다 하더라도 그 노래는 성악가의 노래가 아닌 헨델의 노래인 것이 분명했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마저 도취되어 버릴 정도로, 그만큼 압도적인 존재의 작곡가였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헨델은 그저 겉껍질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는 헨델의 오페라 '타메를라노' 중 바자체트 역할에 관심이 많았다. 이 역할은 최근 도밍고가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열연했던 바로 배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스트리지의 오페라 활동은 경력 초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가족을 이유로 들었다.


“리사이틀과 달리 오페라 공연은 꽤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있어야 하거든요. 아이들을 아내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무엇보다 아직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나이이니까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박사 타이틀을 가지고 성악가로 데뷔했고 지금도 여전히 이지적인 모범생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보스트리지와의 인터뷰 중에 틈틈이 노출되는 중년의 삶과 연륜은 세월이 느껴졌다. 변한 것은 다만 그의 환경뿐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가 초기에 비해 훨씬 어두워지고 무거워졌다고 하더군요. 발성할 때 저도 실감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꼭 나쁜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소리와 표현이 더 깊어졌다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무대에 서는 것이 예전에 비해 덜 공포스러운 걸 보면 저도 제 꽤 노련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늘 마음이 편안한 건 아니에요. 관객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로 시름이 더 깊어졌죠. 한국 관객들과의 만남은 늘 환영입니다. 그처럼 열정적이면서 깊이 있는 청중은 세계 어디서도 만나기 힘들죠. 청중이 가진 매력이 늘 나를 한국으로 이끈다고 할까요. 이번에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 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