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롤링 스톤스와 동급… 진짜 록을 보여주겠다

  • 심현정 기자

입력 : 2011.09.22 03:02 | 수정 : 2011.09.22 11:00

돌아온 메탈 록 밴드 백두산, 데뷔 26년 만에 첫 대형 콘서트
록 하는 후배들 팝 성향 강해 정통을 보여주려 3년 전 재결성
가사 왜 영어로 쓰냐고? 해외 진출 늘 생각하고 있으니까

'록의 형님'들이 돌아왔다. 데뷔 26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하드록 계열의 메탈 밴드 '백두산' 얘기다. 최근 멤버들이 TV 예능 프로그램에 잇따라 출연해 보여준 예상 밖의 코믹한 입담으로 40~50대들뿐만 아니라 10~20대 젊은 층에도 이름을 알리게 됐다. 10월 6~7일엔 데뷔 이후 최초로 1000석 규모의 대형 공연장(서울 광장동 악스홀)에서 콘서트를 연다.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이들은 "토크쇼, 광고 촬영 등의 제의가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다"며 "이제 '백두산'도 (돈을) 거둬들일 때가 된 것 같다"며 자랑부터 했다.

―요즘 말 그대로 '떴다'.

김도균(이하 김) "자연스러운 흐름 같다. 1980년대 우리를 좋아했던 중·고등학생 팬들이 안방 시청자가 됐으니."

유현상(이하 유) "그 덕인지 몰라도 얼마 전 공항에서 만난 한 꼬마가 '백두산이다'라며 쫓아오더라. 함께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줬다. 고마운 마음에 앨범을 보내준다고 쪽지에 주소를 받아왔는데 그 종이를 그만 잃어버렸다."

―1987년 김도균씨가 영국으로 떠나면서 팀이 해체됐다. '대마초 흡입설' '멤버 간 갈등설' 등 말이 많았다.

"피우지도 않은 대마초를 피웠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답답했다. 당시 한국에선 록 음악을 할 만한 토양이 안 돼 있었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깨었던 듯하다. 세계무대에 진출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3년 전 재결성했다. 이유는.

"책임감이 컸다. 미국 록 밴드 키스의 공연에 가보면 30년 넘게 좋아해준 팬들이 아들·딸과 함께 공연을 즐긴다. '백두산'의 오랜 팬들과 꾸준히 교감하면서 신세대에도 록 스피릿을 알려야겠기에 다시 뭉쳤다."

"국내에 정통 록 밴드가 없었다. 후배들을 보면 록 음악의 기본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롤링 스톤스, 아이언 메이든 등 세계적으로 알려진 밴드와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음악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후배들의 '음악 기본'이 부족하다는 건 무슨 뜻인가.

"록 음악은 1960~70년대에 완성됐다. 하지만 록의 맛을 살리는 친구들은 없다. 팝의 요소가 더 강하다. 10대들 사이에서는 꺼져가는 록의 불씨를 되살리려는 모습도 보인다. 정통도 10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됐다."

"연습량이 부족하다. 음악은 노력해서 획득한 테크닉만큼 빛을 발한다. 나는 밥 먹는 시간과 이동하는 시간 외에는 늘 기타를 잡고 있었다. 하도 줄을 뜯다 보니 손톱이 들리고 벌어져 피가 나는 일이 예사였다."

그룹 백두산은“정통 록의 진수를 맛보는 콘서트를 보여드리겠다”며“우리와 함께 뛰고 소리치다 보면 공연 후 일주일은 앓아누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왼쪽부터 박찬·경호진·유현상·김도균. /허영한기자 younghan@chosun.com
―재결성 후 새 멤버(드러머 박찬, 베이시스트 경호진)가 영입됐다. 또 달라진 면이 있나.

"요즘 트렌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형님(유현상)과는 20년 차이 나는 찬이나 호진이는 요새 친구들이 좋아하는 사운드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정통 록을 구현해낼 능력도 가지고 있다."

"찬이의 드럼은 정직했다. 기술을 앞세우지 않고 파워풀한 드럼 사운드를 들려준다."

―함께하는 소감이 어떤가.

박찬 "2008년 콘서트 뒤풀이가 열렸던 홍대 앞 고깃집에서 팬으로 형님들을 만나 멤버로 활동하게 됐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두드려도 형님들은 매의 눈빛으로 문제점을 찾아낸다."

경호진 "1993년에 도균이 형이 혼자 백두산 3집을 준비할 때 참여한 게 인연이 됐다. 한강에서 운동하다 도균 형님의 전화를 받고 다시 함께하게 됐다. 의리 하면 '백두산'이다."

―백두산 노래의 가사는 대부분 영어인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영어 가사를 쓴다. 데뷔 초에는 이태원에서 배운 영어를 바탕으로 가사를 썼고 재결성 후 제작한 4집부터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들의 도움을 받았다. 87년 낸 2집은 해외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만일 해체하지 않고 계속 활동했다면 지금쯤 세계 최고의 밴드가 됐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일본의 한 음악 전문 칼럼니스트가 '지금 일본의 록·헤비메탈 그룹들은 백두산을 본받으라'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세계에 진출해 '백두산'의 이름을 알리고자 했던 우리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백두산'은 아직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