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감독이 만든 판소리 오페라, 우리 소리에 보는 즐거움 더해

  • 허윤희 기자

입력 : 2011.09.14 23:52

[공연리뷰] 아힘 프라이어 '수궁가'

무대는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흰 바탕에 굵은 붓으로 쓱쓱 그린 산과 물, 별과 달의 선(線)이 한국적 정서를 빚어낸다. 마치 판소리 무대에서 창자(唱者) 뒤에 둘러쳐진 병풍처럼. 독일 오페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77)의 손에서 태어난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의 무대는 이렇게 열렸다.

11일 오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막이 오르자 마담 판소리(안숙선)가 앉아 있는 리프트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소리가 시작됐다. 천천히 말하듯 내뱉는 그녀의 음성. "천지가 탄생할 제, 어둠 장막 깜깜한데…." 말은 어느새 노래가 된다. '스토리텔러'인 그녀는 최대 높이 5m의 리프트 위에 앉아 있어 객석에서 보면 거대한 치마를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형태적으로 극대화된 그녀의 창과 발림(몸짓)을 통해 수궁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토끼와 별주부, 용왕 등 등장인물은 그녀의 치마 속에서 나오고 들어갔다. 바다 장막이 위로 올라가면 무대는 바다 세계가 되고, 바다 장막이 아래로 내려오면 육지 세계가 되는 장치도 기발했다. 판소리의 '청각'이 화려하고 세련된 '시각'과 만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검은 바다 위에서 노를 젓는 토끼와 별주부의 여행은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웠다.

/국립극장 제공
하지만 한계도 뚜렷했다. 마담 판소리의 설명만으로 3시간의 장대한 드라마를 끌고 가기엔 극적인 힘이 달렸다. 이야기는 풍부하지만 극은 단조롭고, 특히 1부 둘째마당의 육지 장면은 늘어지고 산만했다. 브레히트의 수제자인 프라이어는 이 작품에서 서사극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어떤 메시지나 감동도 강요하지 않고, 모든 해석을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소외 효과(거리 두기)를 고집했다. 마담 판소리를 제외한 등장인물이 모두 바다와 육지 동물 얼굴의 가면을 쓰고 노래하는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였지만, 가면 때문에 소리꾼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판소리의 본질인 소통과 몰입을 방해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힘 프라이어의 '수궁가'는 판소리가 보편적 예술 장르로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충분히 박수받을 만했다. 곳곳에서 풍자와 해학이 넘쳤다. 마담 판소리 안숙선은 터질 듯한 중량감으로 관객을 압도했고, 토끼 역의 서정금, 별주부 남상일의 연기와 노래도 감칠맛 났다.

별주부는 돈과 명예를 중시하는 세속적 캐릭터로, 토끼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영리한 영웅으로 내세운 해석도 흥미로웠다. 한바탕 소동이 끝난 마지막 장면, 사다리를 타고 달나라로 올라가는 토끼가 뒤를 돌아보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마담 판소리는 처음처럼 다시 흐느끼듯 읊조린다. "이제 모두 다 돌·아·가·오." 덧없다 생각하면 만사가 찰나의 시간인 것을. 희망적 미래를 꿈꾸면서 달만 홀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