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건달 "술 한잔 사소"… 허리춤엔 손도끼가 번쩍

  • 가수 윤형주

입력 : 2011.08.23 03:03

[세시봉, 우리들의 이야기] [16] 오비스 캐빈의 인연
"내가 왜요?" 더 세게 나간 나, 그땐 무슨 배짱이었는지… 결국 그는 술값을 뺏지 못했다

본래 운동을 좋아한다. 아버지가 경희대 학장에 재임할 동안 체육대 유도부·당수부·기계체조부 부원들로부터 운동을 배웠다.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다닐 때 한겨울에도 경희대 체육관 앞에서 새끼줄 두른 나무기둥을 손으로 치고 발차기를 했다. 스케이트와 수영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결혼하고 강릉 경포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오리발을 차고 바다에서 세 시간 이상 수영했다. 처갓집에선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실종신고를 하기도 했다. 경기고등학교에서는 핸드볼과 육상, 농구를 했다.

그렇게 단련한 몸을 서울 명동 오비스 캐빈에서 쓸 줄은 몰랐다. 오비스 캐빈은 세시봉과 달랐다. 세시봉에서 술 마신 사람은 출입 금지였다. 반면 오비스 캐빈은 술 마시러 찾는 곳이었다. 더욱이 명동 한복판이었다. 그만큼 거친 이들이 많았다. 월급날이 되면 꼬박꼬박 나타나 돈 뜯어가려는 사람부터 싸움 거는 사람,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손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비스 캐빈은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라이브 레스토랑이었다. 당연히 데이트 코스로도 인기였으되, 정작 여자들은 공연에 푹 빠져 남자친구에게 무관심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소외된' 남자들은 대부분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기만 했지만, 가끔 술에 취해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송창식에게 "창식아, 혼자 노래하고 있어"라고 말한 뒤 남자에게 다가갔다. "나 의대 다니는데 등록금이 비싸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데, 시끄럽게 굴면서 방해하면 되겠어요?"

때로 상대방은 이 질문에 외려 흥분했다. 그럴 때면 옥상으로 데려가 혼내주기도 했다. 내 나이 스물셋, 혈기왕성한 시절이었다. 무례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도 손님이면 양호했다. 월급날이면 칼같이 명동 건달들이 찾았다. 어느 하루는 누군가 다가와 내게 말했다. "보소. 술 한 잔 사소." 시비조였다. 내가 대꾸했다. "내가 왜 술을 사야 하는지 얘기해 봐요." 그는 말 대신 입고 있던 점퍼를 제쳤다. 허리춤에 손도끼가 보였다. 보이스카우트 캠핑 갈 때 쓰는 유의 손도끼였다. 그걸 꺼내 테이블에 딱 놨다. 그러곤 말했다. "한 잔 사."

무슨 배짱이었나. 강압적인 그의 말투에 더 세게 응대했다. "당신이 나 보고 술 사달라고 빌어도 살까 말까인데, 지금 뭐 하는 거요? 도끼는 나무 찍을 때 쓰는 거지. 남자가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 도끼를 차고 다니는 거요?"

록 그룹 히파이브(He5)가 해체를 앞두고 1968년 명동 오비스 캐빈 무대에서 고별 공연을 하고 있다. 히파이브는 히식스(He6)로 개편한 뒤 1970년대 초까지 활동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히식스 멤버 조용남 제공
결국 그는 술값을 빼앗지 못했다. 훗날 그는 한 유명 여가수의 매니저로 활동했다. 어쩌다 방송사 복도 같은 데서 마주치면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도 도끼 차고 다니나? 보자. 없네." 그는 부끄러운 듯 손을 내저으며 "야야. 조용히 해라. 이제 옛날이야기 그만 하자"고 말하곤 했다.

싸움 직전까지 갔다가 인연을 얻은 경우도 있다. 오비스 캐빈을 자주 찾던 팬 중 극단 예그린 출신 현수정이란 가수가 있었다. 그녀는 주로 신도 나이트클럽과 아스토리아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일하러 가기 전마다 늘 오비스 캐빈에 들러 공연을 지켜봤다. 당시 TV 프로그램 '즐거운 텔스타'에 같이 출연해 아는 사이였다.

하루는 공연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곤 밖으로 나갔다. 느낌이 이상했다. 의협심에 따라갔다. 그 남자는 그녀를 한성화교학교 골목 담벼락에 세워놓고 따귀를 때렸다. 급히 달려가 그를 말렸다. 그는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더 이상 때리지 않았다.

며칠 후 그가 날 찾아왔다. 알고 보니 그는 명동 신상사파의 중간 보스인 김용웅씨였다. 당시엔 '다쓰오'란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현수정은 그가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이랬다. "현수정은 내 약혼녀다. 매일 오비스 캐빈을 찾는 게 불안했다. 찾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결국 그 불안이 그날 터졌고, 나는 그녀와 파혼했다. 하지만 너의 배짱이 마음에 든다. 너와 의형제를 맺고 싶다."

이후로 그와 친해졌다. 김용웅씨는 멋쟁이였다. 넥타이 매는 법부터 바지 주름을 다리는 법까지 멋 부리는 법을 그에게서 배웠다. 훗날 조영남 형에게 그를 소개해줬고, 그 인연으로 김용웅씨는 조영남 형의 매니저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