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살 때 피리, 일흔 넷까지… 인생만사 희로애락을 불었다

  • 김경은 기자
  • 이희원 인턴기자(듀크대 2년)

입력 : 2011.08.03 23:36

악기 인생 70년 이생강 '원형 대금산조' 음반 내

이생강 선생

"다섯 살 때였는데 입에 대자마자 '삐익' 소리가 났어요. 자랑 같지만 부는 재주는 타고난 듯해요. 여덟 살 때부터 연주를 시작했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이 '못 믿겠다'고 의심해 화나고 속상한 적도 많았어요."

죽향(竹香) 이생강(74·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선생이 대나무 소리를 낸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이를 기념, 정악대금으로 연주한 '원형(原形) 대금산조' 음반(신나라뮤직)을 최근 냈다. 전체 63분23초 길이에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시나위' '자진모리'를 순서대로 실었다. "정악(正樂)은 '인쇄체', 산조(散調)는 '필기체'예요. 손가락을 잘 떼서 매끄럽게만 불면 되는 정악대금에 비해 산조대금은 개성 있는 꼴바꿈이 가능하거든요. 선율이 다채롭고 인간 세계의 희로애락이 낙낙히 녹아 있어요."

25일 서울 종로 연습실에서 만난 이씨는 "정악대금으로 연주한 산조 가운데 오늘날 원형으로 꼽히는 박종기(1879~1939) 선생의 녹음을 그대로 불었다. 악기 인생 70년을 집대성하기에 손색이 없다"고 했다.


고희(古稀)를 넘긴 그의 양팔에는 운동선수 버금가는 알통이 배어 있었다. "레슬링, 유도, 마라톤…. 운동 많이 했어요. 대금을 들고 두세 시간 내리 연주한다 생각해봐요. 보통 사람은 5분만 들고 있어도 팔을 바르르 떱니다." 악기 손질도 직접 한다. 대금은 입김을 불어 넣는 취구(吹口)에 수돗물을 흘려보내 씻고 며칠마다 수건을 말아 넣어 닦는다.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 수분이 떨어지면 말라 비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종종 물에 담가둔다.


 

15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 정상 바위 위에 앉아 대금을 연습했다는 이생강 선생은“대금을 오랫동안 불다 보면 악기와 몸이 하나가 되어 원하는 대로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신나라뮤직 제공

일제강점기,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가용 운전기사였다. 부친은 고국이 그리울 때면 대나무밭에서 대나무를 따 손수 악기를 만들어 불었다. 그가 제일 처음 배운 악기는 단소. 대금·피리·단소·소금·퉁소·태평소뿐 아니라 일본의 요코후에(橫笛)와 사쿠하치(尺八)까지, 숨을 불어 넣어 소리를 내는 악기는 무엇이든 배웠다.

광복 후 가족과 함께 귀국한 이씨는 전주역 근처 여인숙에서 21일간 머물며 박종기 선생의 제자인 한주환(1904~1963) 선생에게서 대금을 배웠다. 열세 살 되던 해 발발한 6·25는 그에게 악기를 마음대로 골라 배울 기회를 안겨줬다. 온갖 악기의 명인들이 대거 부산으로 피란 와 있었기 때문. 이씨는 "온종일 부산 길바닥을 뛰어다니며 판소리 스승을 골고루 만나 소리를 배웠다"며 "그렇게 모셨던 스승만 23명"이라고 했다.

1960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민속음악제에서 대금 독주로 파문을 일으켰다. 1960년대 말부터는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씨, 1970년대엔 작곡가 길옥윤씨, 1990년대에는 피아니스트 임동창씨 등과 공동 작업을 하며 국악과 양악(洋樂), 고전과 현대음악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랬던 그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쥔 악기는 대금. "1987년 뇌졸중이 와서 한동안 대금을 못 분 적이 있어요. 4년 전 갑자기 '또 못 부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두려워지더라고요." 정악대금은 취구가 작아서 즉흥으로 꾸밈음을 넣기가 어렵고 손가락을 짚는 지공 사이도 넓어 연주가 한층 까다롭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산조대금이 훨씬 더 좋지만 스승의 음악을 정립하는 데 의미를 뒀다"며 "민속악예술대를 설립해 뼛속부터 우리 것인 국악인을 키우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그가 허탈한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거 만들려고 무척 애를 썼는데 결국 빚만 져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