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비주얼 특별기획 image] 우리도 예술이다

  • 곽아람 기자

입력 : 2011.06.21 23:45

미국 팝아트는 왜 '공산품'을 사랑했나
"맥주캔·전화기·파이… 일상보다 리얼한 예술은 없어"

"저 자식은 먹다 버린 맥주 깡통도 팔아먹을 놈이라니까."

1960년의 어느 날, 추상표현주의 화가 빌럼 데 쿠닝(de Kooning·1904~1997)이 당대의 유명한 미술품 딜러 레오 카스텔리(Castelli·1907~1999)를 가리키며 말했다. 인문주의적 가치를 중시했던 데 쿠닝에게 당시 미술은 너무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실제로 카스텔리는 작가 재스퍼 존스(Johns·1930~)가 청동주물로 맥주깡통을 본뜬 작품 '발렌타인 에일'을 넘겨받아 컬렉터들에게 팔았다. '일상의 하찮은 사물'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었다.

①앤디 워홀의 1964년작‘모트 박스’.ⓒ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SACK Korea, 2011 ②닐 위노커의 1986년작‘전화’.ⓒNeil Winokur, 2011 ③클래스 올덴버그와 코샤 반 브리괸의 2002년작‘부드러운 비올라 1/2’. ⓒClaes Oldenburg and Coosje van Bruggen, 2011 ④클래스 올덴버그의 1965년작‘부드러운 믹서’.ⓒClaes Oldenburg, 2011 ⑤재스퍼 존스의 1979년작‘두 개의 성조기’. ⓒJasper Johns/VAGA, NY and SACK, Seoul, 2011 ⑥크리스토의 1973년작‘포장된 손수레’. ⓒChristo, 2011 ⑦앤디 워홀의 1964년경 작품‘브릴로 박스’.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l Arts, Inc./SACK Korea, 2011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①~⑦)
9월 25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리는 휘트니미술관 소장품전 '이것이 미국미술이다'에는 재스퍼 존스의 작품 '스튜디오'(1964)가 나왔다. 가로 369.6㎝, 세로 224.8㎝의 대형 캔버스에 물감으로 문 등을 그려넣고 맥주 깡통과 붓 등 일상의 물건들을 철사로 엮어 매달아 놓은 작품이다. 우정아 KAIST 교수(서양미술사)는 "재스퍼 존스는 미술이 일상과 유리된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일용품을 작품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47명의 작품 87점을 소개하는 이 전시에는 재스퍼 존스의 작품 이외에도 일상의 소소한 사물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이 대거 등장한다.

 

웨인 티보의 1963년작‘파이 진열대’. ⓒWayne Thiebaud/VAGA, NY and SACK, Seoul, 2011
팝아트(Pop art)의 선구자 앤디 워홀(Warhol·1928~1987)은 당시 미국 가정에서 널리 사용됐던 세제 브랜드인 브릴로(Brillo) 박스를 나무로 똑같이 재현했다. 잡지와 광고회사에서 그래픽 아티스트로 일했던 리처드 에스테스(Estes·1932~)는 사탕가게의 쇼윈도를 정교한 극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묘사했다. 웨인 티보(Thiebaud·1920~)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려 진열대에 놓인 파이나 스낵 등 대량생산된 대중적인 먹을거리들을 클로즈업해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으로 그려냈다.

'특별하고 고차원적인 것'이 아닌 '하찮은 일상'이 작품의 중심 주제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물질만능주의가 자리 잡기 시작한 1960년대의 시대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가 보편화되고 수퍼마켓엔 대량생산의 산물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음식, 세제 등의 '일용품'이 본연의 기능과 더불어 '상품'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됐다. 소비자들을 유혹하기 위한 '상표'가 등장하고, 구매욕을 자극하는 광고가 쏟아졌다.

재스퍼 존스의 1964년작‘스튜디오’. ⓒ Jasper Johns/VAGA, NY and SACK, Seoul, 2011
당시 예술가들의 눈엔 이 모든 것들이 신선한 자극이자, 표현하고 싶은 '대상'으로 다가왔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산업화와 근대화 이후에는 신(神)이나 역사의 시각에서 거시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보다는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과 욕망의 시각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한 리얼리티가 됐다. 물질화·현대화가 진행된 1960년대 이후 미국 예술가들이 일상의 오브제를 작품화한 것은 그것이 시대를 표상하는 진정한 리얼리티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작가들은 때론 물질문명을 숭배하며, 때로는 경멸하며 '물건'을 작품화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존재만으로 이들은 미술사의 '한 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