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1.06.20 02:24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파리 공연서… 지휘 정명훈·피아노 김선욱 '묵직한 협연'
서곡 없이 곧바로 협주곡으로 시작한 이날 연주회에서 김선욱은 피아노 앞까지 성큼 나서서 90도 자세로 인사하면서 다부진 모습을 보였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10년째 맡고 있는 지휘자 정명훈은 한 걸음 물러서서 한국의 신예를 파리 청중에게 소개했다.
곡이 시작하기 무섭게 총성이 울리면서 곧바로 질주하는, 작곡가의 다른 피아노 협주곡과는 달리 이 곡만큼은 다소 느리고 장중하게 출발한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도 조용히 눈짓으로 사인을 주고받은 뒤 차분하게 음표의 물결을 일으켜갔다.
그동안 베토벤과 브람스 등 독일 고전 레퍼토리에 천착해온 김선욱은 20세기 러시아 작품에서는 넘치는 힘을 그대로 건반에 분출했다. 당대의 피아니스트였던 작곡가 자신이 첫 미국 독주회 당시 뉴욕타임스로부터 "강철 손목"이라는 호평을 들었다면, 파리 무대에 오른 한국 피아니스트의 손목은 장작 패는 도끼처럼 단단했다.
짧은 2악장에 이어서 부지런히 양손을 교차하며 러시아 특유의 약동하는 리듬감을 살려나간 3악장 도입에 이르자 피아노의 무한 질주도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조용히 악보를 넘기며 지휘하던 정명훈도 악장이 끝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無言)의 신뢰를 보냈다.
서울시향의 예술감독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겸하고 있는 정명훈은 최근 입버릇처럼 "나를 활용하라"는 주문을 한국 음악계에 보내고 있다. 젊은 연주자들을 발굴하고 세계무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맡겠다는 다짐이다. 김선욱뿐이 아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17)도 서울시향을 통해 국내 팬들 앞에서 검증을 거친 뒤 올해 체코 필하모닉의 일본 투어에도 협연자로 동승했고 지휘봉은 모두 정명훈이 잡았다. 그는 "한국의 연주자들은 평소보다 훨씬 엄격하게 판단하는 편이지만, 최근에는 눈부실 만큼 빼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어서 소개할 때에도 흥이 난다"고 말했다.
30여분의 협연이 끝나고 파리 관객들의 환호에 네 차례 무대로 거듭 불려 나온 지휘자와 협연자는 마지막에 가볍게 서로 얼싸안았다. 김선욱은 "어릴 적부터 우상이었던 지휘자와 협연할 때마다 마음 한편으로 부담이 된다"고 했지만, 파리의 무대 뒤에서 정명훈은 그에게 딱 한마디를 건넸다. "지독히 잘했어." 유럽에서 한국 클래식 음악의 한류(韓流)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