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봉 2개 '뚝'… 악보도 없이

  • 빈=김성현 기자

입력 : 2011.06.02 03:08

빈 필 하모닉 지휘 정명훈 '열정의 165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영국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와 함께 세계 최고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오페라극장(빈 슈타츠오퍼). 지난달 30일 이 극장 무대에 올라온 지휘자 정명훈<사진>의 손에서는 악보가 들려 있지 않았다. 이날 베르디의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한 정명훈은 휴식 시간을 포함해 2시간 45분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암보(暗譜)로 임했다. 1986년 33세의 나이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을 때, 1994년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마지막 무대에서도 그는 이 작품을 연주했다.

대신 악보를 놓아두는 그의 보면대(譜面臺)에는 크기도, 색깔도 다른 지휘봉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정명훈은 사흘 전 같은 오페라 공연 도중 열정적 동작 때문에 지휘봉을 두 개나 부러뜨리고 말았다. 아내 구순열씨는 "같은 연주회에서 지휘봉이 두 개나 부러진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고 했다. 부러진 지휘봉 하나는 직접 이어 붙여 이날 들고 나왔다. 다른 하나는 관객이 선물한 장미 나뭇가지. 막간 장면 전환 동안 두 손으로 '장미 지휘봉'을 만져보기는 했지만 결국 정명훈은 이날 공연 내내 '재활용 지휘봉'을 사용했다.

정명훈은 빈 필 하모닉과는 여러 번 호흡을 맞췄지만 이 무대에서 지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극장의 단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오케스트라가 바로 빈 필하모닉이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은 빈 필의 모체(母體)다.

마땅히 있어야 할 악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지휘자의 동선도 한결 자유로워졌다. 제노바의 총독인 시몬 보카네그라와 딸 마리아가 뒤늦게 부녀 사이였음을 서로 확인하는 1막의 2중창부터 지휘자가 양손을 더 크게 벌리며 감정을 살리라고 주문하자, 극장 오케스트라의 울림도 한층 진해졌다. 오페라 공연의 경우 무대 아래 피트(pit)의 지휘자는 앉아서 지휘하는 경우가 많지만 정명훈의 지휘대에서는 의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휘대를 전후좌우로 폭넓게 활용하면서 무대 아래서 무대 위까지 끌고나가는 그의 지휘 덕분에 마치 '성악을 곁들인 교향악'을 보는 듯 사운드에도 입체감과 생생함이 더해졌다. 막간 무대 전환 때는 지휘대 위에 털썩 주저앉아 몸을 풀거나 단원들과 같은 눈높이로 담소를 나눴다.

서울시향 예술 감독인 그는 빈에서도 고국의 모습 그대로였다. 무대 뒤편의 합창단을 향해 사인을 보낼 때는 왼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입 모양까지 맞추며 단호한 지시를 내렸지만 거꾸로 단원들을 향해서는 곧잘 두 눈을 감은 채 지휘봉에 힘을 실었다. 단원들과의 자연스러운 호흡을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이 그대로 배어났다. 막이 내리고 객석의 환호도 지휘자에게 집중됐지만 정작 무대 뒤 정명훈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조용한 톤으로 말했다. "외워서 하는 것이 힘든 것은 아니지…."